오늘의 문장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의견이 다르고, 헤겔은 칸트와 의견이 다르다.”

좋은 문장이다.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A, P, K, H가 다 들어 있는, 보기 드문 명문이다. 자주 인용해야겠다.

명절이다. 부모는 늙고 병들고, 자식은 크고 철드는 명절이다. 명절은 명절적으로 보내는 게 좋다. 명절적으로 보내는 명절이란 어떤 명절인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오늘이 명절이라는 걸 의식하고 각자의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 명절을 명절적으로 보내는 것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명절이 있다. 각자의 안이비설신의 명절이 있고, 각자의 색성향미촉법 명절이 있다.

신경망 점화

“의식적인 생각은 느리게 진행된다. 또 이것은 폭이 매우 좁은 병목을 지니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의식적인 생각을 두 가지 이상 동시에 진행하기 매우 어렵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서 무의식적인 생각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며, 또 이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병목 현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승자의 뇌>>>, 117쪽

당신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에서 용각산으로,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로 연결된 연결은 방금 연결된 연결인가, (방금 연결된 연결인가, 다음에 순간적으로 또다른 연결이 연결되었지만 그만 연결하자.) 당신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다음에 내가 생각했던 문장은 어디로 갔는가.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쩌면 지금도 거기 있을 거 같은데, 나는 왜 연결을 잃었는가. 왜 연결하고 싶은 연결은 연결되지 않고, 왜 연결되지 않아도 좋을 연결은 연결되는가. 당신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일기

어제 모처에서 모 뮤지컬을 관람하고 돌아오면서 퓨어한 시리와 그 일당들께옵서 나라를 말아드시는 사이에 훌쩍 커버린 자식에게 좋았냐, 하고 물었다. 자식은 살다살다 이젠, 저보다 키도 작은 아빠한테 별 시답잖은 질문까지 다 듣는다는 듯이 당연하지,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어조가 퉁명스러웠던 것도 같다.

레드, 블루, 그린, 시안, 마젠타, 옐로우, 조명은 어지럽고, 혁명인가요, 오늘 밤 혁명이 시작될 거예요, 저도 같이 가겠어요, 코젤, 나는 절대 죽지 않아요, 나를 믿어요, 대사는 낯간지럽고, 우리가 원했던 건 새로운 세상, 새로운 하늘, 새로운 역사가 아니리, 노래는 시끄럽기만 한바탕의 퍼포먼스가 좋은 게 어째서 당연한 건지, 속으로만 궁금해 했다.

고루한 나한테는 텍스트가 딱이다.

착한 일 IV

어제는 아내따라 가죽공방에 갔다가 오랜 만에 착한 일을 했다. 공방에는 아내 외에 두 명의 수강생이 더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하냥 부끄러웠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러저런 얘기들을 했다. 젊음 여성은 친정 아버지 가방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지금이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나는 아 그게 그 유명한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는 아버지 가방이냐고, 말만 들었지 실물을 본 건 처음이라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겼다. 착한 일은 성공적이었다. 심지어 묵묵히 바느질을 하고 있던 젊은 남성도 웃었다. 그동안 착한 일을 너무 못하고 살았다. 착한 일을 더 많이 해야겠다.

일기

오래 전에 누군가의 집에 유사-집들이 갔을 때의 기억이다. 식사를 마치고 난 빈 그릇들을 그집 남자가 대충 물에 헹구어서, 그러니까 건더기는 잘 떼어내고 물을 묻혀서 식기세척기에 넣는 걸 보았다. 그집 남자는 그때 초벌-설거지를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식기세척기를 쓰는 장면을 본 적은 없다.

막내와 단 둘이 오붓하게 저녁을 먹으며, 넌 공부 외에 해보고 싶은 게 뭐냐는 둥 몇 마디 붙여보다가 그냥 스마트폰이나 보는 게 낫겠다 싶어 타임라인이나 훑는다. 막내가 곧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일어난다. 잠시 후 나도 식사를 마친다. 오붓하기는 개뿔.

반찬, 냉장고에 넣고, 식탁, 정리하고, 행주질하고, 개수대에 그릇을 담그며 수저는 따로 분류해 냄비에 담고, 접시와 공기는 또 따로 대충 헹구어서 종류별로 나누어 물에 불려놓는다. 이렇게 초벌-설거지를 해두면 나중에 본격-설거지할 때 편하다. 아이들은 초벌-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문득 말 하나가 떠오른다. 식기세척기적, 이라는 말이다. 마음에 든다. 이제는 돌아와 싱크대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식기세척기적인 나여! 여기까지 적었는데 설거지적, 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이 말도 괜찮다. 초벌-설거지적, 이라는 말도 좋다. 적절한 TPO에 응용하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똥적, 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기억도 난다.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다. 시집 한 권, 소설 책 한 권. 시집은 초판이고 소설은 30쇄이다. 늘 그렇듯이 책 제목은 말해주지 않겠다. 일기는 산만하고 주제는 없다. 따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