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바깥에 있는 사태들”과 텍스트

즉 하나의 과학적 텍스트는, 특히 그것이 어떤 “저 바깥에 있는 것” 예를 들면 “원자”를 의미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바흐의 푸가나 몬드리안의 그림들과 구분되고 있다. 그것은 “진리적”이고자 한다. 즉, 저기 바깥에 있는 사태들과 정합적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쩌면 어떤 놀라운 미학적.인식론적 문제가 제기 된다 : 도대체 텍스트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저기 바깥에 놓여 있는 사태와 정합적인가? —p. 54

즉 신문의 내용 중 한 부분은 도서관으로 향하고, 나머지의 대부분들은 쓰레기통으로 던져진다. 따라서 완전히 다른 유형의, 신문에 글쓰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신문에 글쓰는 사람들 중 한 부류는 도서관들을 위해 쓰고, 다른 부류는 쓰레기통을 위해 쓰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신문은 두 부류로 나눠질 수 있다. 즉 대체적으로 도서관에 적합한 신문과 그 대부분이 휴지통에 적합한 신문. —p. 207

—빌렘 플루서(지음), 윤종석(옮김),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문에출판사, 2002(1판 3쇄), p.54

그렇게 우정은 추문이 된다

친구는 관계의 이름이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그렇게 우정은 추문이 된다, 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물과 술과 안주와 위산과 위장과 식도를 치욕처럼 토하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은 봄밤, 책상벽에 붙여둔 포스트잇이 떨어져 한 장 낙엽으로 방바닥에 뒹군다

<노아>

1.
잠꾸러기 아녀자들은 모다 단잠을 주무시는 시간에 우리 남정네들 마침 새벽종도 울리고 새아침도 밝고 해서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는 심정으로, 그러니까 우국지정으로 집을 나서 막내가 자기 용돈으로 보여주는 조조 영화를 봤다. 팝콘까지 얻어 먹었다. 잔돈은 삥땅치려다 실패했다.

2.
“니네 인간들 사는 꼴이 대략 한심하여 내 머지 많아 비를 대따 많이 퍼부어 온 세상을 아조 물에 잠기게 할 것인즉 너는 겁나 큰 배를 뚝딱 만들어 모든 동물들을 다만 한 쌍씩만 태웠다가 낭중에 낭중에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면 그들을 풀어놓도록 하라. 그 다음은 그들이 알아서 교미하고 그들이 알아서 번식하고 그들이 알아서 살아갈 것이다. 너도 아다시피 동물들은 죄가 없다. 배를 만들 때는, 내 말 아니 듣고 겁없이 나대다가 바위(ㅅ)덩어리 속에 갖혀 있는 돌탱이 천사놈들의 도움을 받아도 좋다.”

“저,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할까요?”

“죽이든지 살리든지 니 맘대로 해라. 내 일찍이 네게 자유의지를 주지 않았느냐. 죽음을 선택한다면 니 손으로 니 손녀들을 죽여야 할 것이로되, 삶을 선택한다면 사는 건 너 알아서 살아라. 나는 모른다. 나는 말씀이 아니다. 나는 침묵이다.”

3.
제니퍼 코넬리에 대해서 한 마디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흑미 전쟁

내가 몸소 직접 친히 씻어 불려 놓은 백미에 아내가 흑미를 섞어 놓았다. 내 마음은 영혼까지 까매졌다. 전쟁이다.

창가에서

지근거리에 목련꽃이 피고
유리창마다 바람이 불었다
여자는 검은 외투를 벗고
창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여자가 펼쳐놓은 지면에서는
스파게티가 굴욕적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창문을 닫아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남자는 다른 자리로 옮겨 앉지도 못했다
유리창마다 바람이 불고
여자는 스파게티에 얼굴을 박은채 흐느끼고
창밖의 나무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남자는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