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

병원 정문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본관을 향해 걸어가면서, 진료카드를 안 가져와서 접수대에 예약 시간과 담당 의사 이름을 대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의사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제길, 나도 다 됐구나, 하면서 터덜터덜 걷는다. 그런데 우리집 안방보다 큰 회전문에 접어드는 순간에 의사 이름이 딱 떠오른다. 이래서 병원 공기를 마셔야 한다니까. 음, 이 걱정과 근심의 냄새.

접수를 마치고 전광판에 내 차례를 알리는 번호가 뜨기를 기다리며 대기석에 앉는다. 30분 정도 남았다. 늘 주는 번호표, 외래 진료 진행 안내문 외에 오늘은 뭔가 한 장이 더 있다. 환자의 권리, 환자의 책임이 앞뒤로 인쇄된 A5 크기의 종이다. 읽어 본다. 환자는 … 권리가 있다. 환자는 … 책임이 있다, 는 문장이 나열돼 있다. 최소한 라임은 맞는다. 아, 아픈 것도 서러운데 권리도 많고 책임도 많군.

시간 드럽게 안 간다. 아직도 2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확인하며, 나는 이제 아이폰으로 웹서핑을 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블로그와 아무도 말걸어 주지 않는 트위터와 아무도 메시지 보내주지 않는 이메일을 다 확인한다. 와이파이 신호는 많이 잡히는데 다 비밀번호로 잠가놨다. 인심 한번 고약하군.

그제서야 누군가가 읽다가 놓고 간 옆자리의 여성지가 눈에 들어온다. 여성동아다. 넘겨 본다. 와, 예쁘다. 와, 멋있다. 와, 야하다. 광고 페이지를 넘겨보며 감탄을 하다가, 아니다. 지금 내가 이미지에 속을 때가 아니지, 텍스트를 읽어야지, 텍스트를! 하고 기사를 살펴보니 신애라가 홈스쿨링을 한다는 얘기, 설경구가 송윤하 하고 사는 얘기 등이 있다. 여성지가 어디 가겠어? 고개를 들어 내 번호가 한 칸 위로 올라간 걸 확인하고, 다시 잡지에 코를 처박으려는 순간, 앞줄에 앉은 사내의 손에 들려 있는 초음파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사내의 오른쪽에는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다. 둘은 말이 없다.

잠시 후 무대 왼쪽에서 어떤 여자 사람이 손에 신문을 잔뜩 들고 등장해서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나눠주기 시작한다. 읽어보세요. 읽어보세요. 하느님 말씀이 적혀 있어요. 나는 그 여자 사람이 내게도 그걸 건넬까 두려워 잡지를 열심히 읽는 연기를 한다. 소용 없다. 잠시 후 잡지 위로 신문이 쑥 들어온다. 읽어 보세요. 그러면 그렇지. 바랄 걸 바라야지. 또 성격 돋는다. 이봐요, 나는 지금 하느님 말씀 보다 홈스쿨링 얘기에 더 관심이 있다구요. 내가 자그마치 애가 셋이요, 셋! 이라는 말을 꾹 삼키고 퉁명스럽게 기어코 한 마디 뱉는다. 지금 이거 읽고 있잖아요. 여자 사람은 무안해졌는지 다음 사람에게 간다. 못난 놈. 미안합니다. 제가 좀 돼먹지 못했거든요.

의사도 별 말이 없고 나도 별 말이 없다. 6개월 뒤에 봅시다. 네,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돌아나오며 이곳에 다시 오면 그때는 목련꽃 봄이겠구나, 생각한다. 이제 진료비, 검사비 수납하고 약국 갈 시간이다. 수납은 기계 앞에서 한다. 줄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빠르고 편하다.

애초에 병원에서 제일 가까운 약국을 선택하는 게 아니었다. 10미터만 더 가면 파리 날리는 약국이 즐비한데 이 약국만 늘 붐빈다. 처방전 디밀고, 호명하면 수납하고, 다시 기다리다가 다시 호명하면 약 받아 나오면 된다. 내 앞의 여자 사람은 553,370원을 6개월 할부로 결제한다. 내 약값은 4,700원! 나를 호명한 약사는 약을 건네며 의무감인지 직업의식인지 이것저것 설명하려 들고, 나는 긴 병에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시쿤둥하게 듣다가 약국을 나온다. 끝났다.

약국을 나와 다시 병원 주차장으로 향한다. 내 앞에 털모자를 눌러쓴, 병색이 완연한 여자 아이가, 무전기를 든 직원이 지키고 선 길을, 엄마 손을 잡고 힘겹게 걸어간다. 병원앞 도로는 꽉 막혀 있다. 나는 어디 가야 담배를 살 수 있을까 생각한다. 하늘은 드럽게 푸르고 10월의 마지막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Posted in 블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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