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을 날

설명하자면 길다. 토요일, 여차저차 해서 딸과 둘만 남았다. 딸에게 영화를 보여주마 약속했고 보여줬다. 딸은 옆에서 쿡쿡, 킥킥, 웃었다. 나는 저 배우 예쁘네, 저놈아 웃기네, 이 대사 재밌네, 하며, 젊음을 시기했다. 팝콘은 너무 달았다. 고소한 맛을 줄까, 달콤한 맛을 줄까, 영화관 알바가 묻을 때, 인생은 고소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으니 쓴 맛을 다오, 라고 내가 머리 속에서 썰렁한 드립을 치는 사이, 딸이 냉큼 달콤한 맛을 달라고 말해 버렸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딸은 지 콜라 다 마시고 내 콜라까지 뺏어 먹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녁은 뭘 사줄거냐고 딸이 물었다. 뭐 먹고 싶니? 뷔페! 니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칼국수! 니가 이제야 정신이 돌아왔구나. 주말 저녁, 도로를 조금 신나게 달려 우리는 칼국수집엘 갔다. RPM이 순간적으로 5000을 넘나들었고, 딸은 옆에서 신난다고 말했다. 오늘은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만두 한 접시 시키면 너랑 나랑 세 개씩 먹을 수 있어. 그러네. 결과적으로 만두는 내가 네 개 먹고 딸은 두 개 먹었다. 칼숙수가 막 나왔을 때 나는 내 몫의 세 번째 만두를 막 입에 넣는 중이었고, 딸 몫의 만두는 두 개가 아직 접시에 남아 있었다.

칼숙수를 보자 딸은 곧바로 칼국수에 손을 댔다. 이거 하나 내가 먹어도 돼? 나는 칼국수에서 눈을 거두고 딸의 만두에 젓가락을 가져가며 물었고 딸은 선심쓰듯 그러라고 했다. 이제 보니 이 집 칼국수는 면발이, 노란 기저기 고무줄처럼 굵다. 나는 딸이 먹기 좋게 김치를 찢어주었다. 딸도 나도 별로 말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이것저것 말을 시키는 꼰대짓을 하고 싶지 않았고, 딸도 엄마를 닮아 말수가 적었다. 이상하게 조개가 잘았다. 이 조개도 수입한 건가. 더러 모래가 입안에서 까끌거렸다.

만두 얘기 아직 안 끝났다. 세숫대야 만한 칼국수 그릇에서 마지막 면발 두 가닥을 건져 올렸을 때에도 접시에 만두가 하나 남아 있었다. 딸은 배부르다는 말을 했다. 잘 하면 저것도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그 만두 먹을 거니? 응. 딸은 이제 좀 식었겠지, 하며 만두를 집어 들더니 한 입에 두 동강을 내고, 잠시 망설이다가 반을 간장 종지에 내려 놓았다. 아예 간장에 말아 먹지 그러냐! 여기다 마는 것보다는 낫지, 하며 딸은 칼국수 국물이 남아 있는 제 앞접시를 가리켰다. 딸이 마지막 만두 반쪽을 마저 처리하는 동안 나는 세숫대야 만한 칼국수 그릇에서 조개살 두 개를 건져 먹었다. 치사한 자식, 반만 줄 것이지, 라고 생각하면서. 아, 배부르다.

음식값을 치루고, 박하사탕을 하나 물고, 배를 퉁퉁 두 번 친 다음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이번 신호에 저 사거리를 기필코 건너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페달을 밟았고, 이 놈의 빨간 신호등은 두환이처럼 명도 지지리도 길다 생각하며 쓰리, 투, 원 카운트 다운을 했다. 이러는 날 아내는 재밌어도 했고 유치하게 여기기도 했는데 딸은 뭐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알게 뭐람, 딸한테 장가갈 것도 아닌데. 라디오에 스위치를 넣었다가 이내 꺼버렸다. 아빠, 나 노래 세 곡만 새로 다운로드 받게 해줘. 그러지 뭐.

지금은 0시 14분. 몇 분 전까지 침대에 엎드려 A4 용지를 수북이 쌓아놓고 뭔가 그려대던 딸은 불끄고 잠들어 있다. 아내가 애 시험공부 좀 시키라고 했는데 하나토 안 시켰다. 딸이 낮에 30분 공부했다고 자랑한 게 전부다. 끝으로 점심에는 김치와, 아내가 처가에서 가져온 오이지 무침과, 계란 후라이 하나 넣고 비빈 내 비빕밥을 딸이 맛있다고 뺐어 먹었다는 것도 적어둬야 겠다.

Posted in 블루 노트.

6 Comments

  1. 걸식/ 나는 울 싸모님 모시고 ‘아저씨’를 두 번 봤다능. 영화 끝나고 나오면서 이제야 갈증이 좀 풀린다, 하더이다.

  2. ‘아저씨’ 보고 나오는데 넋이 반쯤 나간 여친의 눈빛, 잊을 수가 없소.
    원빈은 모든 남자의 ‘공공의 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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