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표를 뽑아들고 차례를 기다린다. 10여명이 내 앞에 있다. 잠깐 딴짓을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새 내 차례가 지나간다.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잦다.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친 적도 여러 번이다. 다시 번호표를 뽑아든다. 또 딴짓을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번호가 호출되어 있다. 나는 카운터로 다가가 번호표를 내밀면서 12345678이라고 말한다. 직원이 신분증이나 진료카드를 달라고 한다. 나는 선명한 발음으로 12345678이라고 말한다. 직원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키보드로 내가 누구인지 조회한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나처럼 스마트한 환자도 있는거라구. 직원이 고개를 들더니 그런 번호는 등록돼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럴 리가 없다. 멍청한 병원 같으니라구. 다 귀찮아진 나는 운전면허증을 내민다. 직원은 내 주민등록번호로 내가 누구인지 확인한 다음, 채혈 순서가 인쇄된 번호표를 뽑아준다. 10345678이네요, 라고 덧붙여 말하면서. 직원이, 세상엔 꼭 너처럼 잘난 척하는 인간들이 많지, 하는 거 같다. 채혈실 안에도 사람들이 많다. 하얀 가운 입고 앉아 피를 뽑는 여자들, 다 드라큐라처럼 생겼다. 주사바늘이 혈관을 파고든다. 지랄처럼 따갑다. 피같은 내 피, 참 많이도 뽑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