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들, 지난 여름 그 무성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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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et QL17 G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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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결혼식이 있다며 출근을 제끼신 아버지는
    오전 내내, 지하철 노선표만 들여다보셨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초행길 운전을 꺼리셨던 아버지.
    더군다나 중년 이후 생활의 동선이 경기도권 안으로
    굳혀지면서, 서울로 직접 차를 몰고 나가시는 일은
    좀처럼 시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 두이, 서이, 너이.. 하나, 두이, 서이, 너이..”
    결혼식 장소까지 지하철로 몇 구간을 가야하는지
    세고 또 세고..정확히 어느 역에서 갈아타야 하는지
    자식들에게 번갈아가며 확인하시던 아버지는
    교통요금까지 미리부터 동전으로 준비해 두셨습니다.
    “청승도 아니고, 궁색도 아니고..
    차를 두고도 사서 고생이라”며.. 곁에 있던 어머니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드디어,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외출 점검..
    양복 안주머니 안에 잘 넣어둔 지하철 노선표.
    또한 교통요금은 정확히 챙겼는지..
    쩔렁쩔렁 소리나는 동전들을 꼼꼼히 확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버지의 어눌한 손놀림에
    동전 하나가 바닥으로 내리꽂혔습니다.
    댕그르르르~ 구르고 또 굴러서
    거실 장식장 바닥틈새로 숨어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자식들은 서로 타두듯
    새로운 동전 하나를 아버지에게 내밀었지만
    당신은 본척 만척, 어느새 긴 막대를 찾아와
    장식장 바닥을 휘젓고 계셨습니다.
    “거 참.. 잘 차려입은 양복 다 버리겄네..
    그러다가 결혼식 늦어욧!
    언능 새 동전 받아갖고 나가라니깐요, 글쎗!”
    아버지의 기상한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어머니도
    자식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랑곳없이, 작고 납작한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아버지의 행동.
    그 때, 옆에 있던 자식 하나가
    한숨 섞인 말들을 흘렸습니다.
    “..아버지 뒤통수 좀 봐라….속이 훤하시다….
    언제 저렇게 머리카락이 다 빠지셨지….”
    얘기를 듣고 보니, 그랬습니다. 섬뜩하기까지 했습니다.
    ….자식새끼들, 매년 아버지 연세만 꼬박꼬박
    업데이트 해두면 자식노릇 하는 줄 알고….
    뭐 그리 대단한 일 하며 산다고..
    ….참 이상합니다.
    하루하루 얼굴에서 번식하고 있는 골패인 주름과
    듬성듬성 숫자를 잃어가는 아버지의 초라한 뒤통수가
    왜 그때까지 한번도 눈에 걸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저.. 엉성하게 남은 담쟁이 넝쿨을 본 순간,
    왜 나는… 그날의, 내 아버지의 연약해 보이던
    뒤통수를 떠올렸을까….

  2. 식은 김치 찌개 다시 덮힌 양은 냄비와 한 공기의 밥과 반 쯤 남은 소주 한 병과 소주잔 하나가 올려져 있는 소반과, 그 앞에 앉은 아버지와, 그 소반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마주 앉은 텔레비전.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밤에 집에 돌아와 안방 문을 열었을 때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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