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뜬금없이 /너무 낡은 기억은 기억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너무 낡아 기억이 아닌, 그, 기억.

세탁기 유감

아내가 세탁해 준 양말이 내가 빤 양말보다 우유빛으로 뽀얗게 빛나는 건 필시 저 못 돼 처먹은 세탁기 새끼가 아내를 더 예뻐하기 때문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결과물이 이렇게 차이가 날 리가 없지. 아무렴. 이제 다 늙어가지고 탈수할 때마다 천둥소리를 내는 주제에.

메모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뭣좀 하고 있는데 막내가 한 마디 한다.

“아빠, 요즘 되게 외로워 보여.”

“아빠가?”

“응. 그러고 있으니까.”

가을이니까. 아무렴.

목적지를 향한 상상의 화살표

1.
이 글의 주제는 심심한데 독도법을 이용해서 방향을 찾는데 필요한 기본 지식이나 알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써먹)자는 것이다. 독도법은 지도와 나침반이라는 도구와, 방위각이라는 기하학적 관념을 이용하여 나아갈 방향을 판단하는 기술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정하기 위해서는 지도상의 두 지점만 알면 된다. 다시 말해 <여기>와 <저기>를 지도상에 표시하고 이 두 점을 연결하는 가상의 화살표를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목적지를 향한 상상의 화살표! 이것이 방향감각이다. 말은 쉽다.

가만 보니 네비게이션라는 기계가 해주는 일이 딱 이거다. 네비게이션은 목적지를 입력하면 현위치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을 잘도 알려준다. 그러니 독도법을 배우고 때로 익히기가 마뜩찮은 사람은 스마트폰의 GPS 어플을 이용하거나 휴대용 GPS 기계를 사서 쓰면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귀찮은 사람은, 미안하지만 그런 류의 GPS 사용법을 제대로 익히는 것도 귀찮을 것이다.

2.
기술은 도구보다 관념이 먼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좋은 나침반 손에 잡아 봐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그저 아 저쪽이 북쪽이구나, 할 뿐이다. 핵심 개념인 방위각을 먼저 이해해야 우리는 나침반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무얼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방위각이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그은 반직선이 자오선과 벌어진 정도를 0에서 360까지 수로 표현한 물리량이다. 말이 번거롭다. 간단히 말해서 방위각이란 방향을 수로 표현한 것이다. 예컨대 북쪽은 0도, 동쪽은 90도, 남쪽은 180도, 서쪽은 270도, 이런 식이다. 방위각을 사용하면 방향을 1도 단위로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방위각에는 중요한 점이 세 개 있다. 중심점, 북극점, 목표점이 그것이다. 중심점은 나침반의 회전축이고, 북극점은 모든 자오선이 만나는 지구상 딱 두 개의 점 가운데 하나이며, 목표점은 우리가 나침반으로 겨냥해야 하는 산봉우리나 큰 나무 따위의 지형지물이다. 방위각 측정은 다음과 같이 한다. 즉 나침반의 정면으로 목표점을 정조준하고, 베젤을 돌려 바늘의 북쪽과 눈금 상의 0도를 일치시킨 다음, 방위각 측정선의 눈금을 읽는다. 실제로 나침반을 들고 해보면 별거 아니다.

나침반의 눈금을 읽었다고 끝난 게 아니다.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자북*과 북극점이 있는 진북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보정해 주어야 하고, 또 지도상의 북쪽—도북이라고 한다—과 진북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보정해 주어야 한다. 즉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위에서 자북과 도북과의 편차만큼 더하거나 빼야 한다. 그 편차는 어떻게 아는가. 걱정할 거 없다. 지도에 다 나와 있으니 그걸 보고 공식에 넣어 계산해야 한다. 머리 아프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자북과 도북은 지구상의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고, 따라서 공식에 대입해야 하는 수치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초 단위까지 자세하게 계산 해봐야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할 나침반 해상도가, 전문용어로 방위각 분해능이 고작 1~2도이기 때문에 초 단위는 별로 쓸모가 없다. 대충 퉁치면 된다. 내가 사는 지역은 자북의 약 7도 정도 우측 방향이 진북이다. 사물은 실제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고 북쪽은 바늘이 가리키는 곳보다 우측에 있다.

3.
방위각을 구성하는 세 개의 점 가운데 북극점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으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중심점과 목표점이다. 방위각을 측정해 지도상에 반직선을 그으려면 중심점이나 목표점 이 둘 중의 하나의 위치는 지도상에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저기>도 어디인지 모르는데 방위각을 측정한 다음에 대체 지도 상의 어디서 어디로 선을 그을 수 있겠는가. 또한 방위각은 최소한 두 번은 측정해야 하는데 내가 지도상의 위치를 알고자 하는 곳이 <여기>인지 아니면 저 멀리 눈앞에 보이는 <저기>인지에 따라 측정 장소가 다르다. 다음의, 허무맹랑한 예를 보자.

“먹으라는 사료는 안 먹고 ‘거미로 그물쳐서 물고기 잡으러’ 바다로 떠난 낭만 고양이는 동해 먼 바다 어디 쯤에서 기관 고장으로 표류한다. 이 안타까운 광경을 금강산 꼭대기에서 지켜보고 있던 독도법 전문가가 낭만 고양이의 방위각을 측정해 지도에 선을 하나 후딱 긋고는, 순식간에 토함산 꼭대기로 날아가 다시 한 번 낭만 고양이의 방위각을 측정해 지도에 또하나의 선을 후딱 긋는다. 이 두 개의 직선은 한 점에서 교차하고, 그 교차점이 바로 지도상의 낭만 고양이의 현재 위치이다. 전문가는 곧 해체될 운명에 처한 해경을 주축으로 하는 구조대에게 낭만 고양이의 좌표를 급하게 타전해 준다. 한편, 낭만 절망 고양이는 자기 나름대로 금강산 꼭대기와 토함산 꼭대기의 방위각을 측정해 자신이 있는 곳과 두 봉우리를 연결하는 두 개의 직선을 각각 지도에 긋는다. 이들 두 직선은 앞서 전문가가 그린 선들과 정확히 일치하고, 낭만 절망 고양이는 이로써 최소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게 된다. 자, 우리의 낭만 절망 희망 고양이는 과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쓰여지지 않은 졸고 <바다로 떠난 낭만 고양이>의 시놉시스)

금강산 꼭대기와 토함산 꼭대기는 지도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 모르는 곳은 다만 고양이의 위치이다. 이처럼 아는 지점 두 곳에서 모르는 지점 한 곳에 대한 방위각을 각각 측정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모르는 지점 한 곳에서 아는 지점 두 곳에 대한 방위각을 각각 측정하여 모르는 지점의 지도상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이것이 독도법의 핵심이다. 전자의 방법을 전방교차법, 후자의 방법을 후방교차법이라 부른다. 중심점이 두 곳인 전방교차법은 이를테면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을, 즉 <저기>를 아는데 쓰고, 중심점이 한 곳인 후방교차법은 현재 자신의 위치를, 즉 <여기>를 파악하는데 쓴다. 중심점이 두 곳이라는 말은 독도법 전문가가 금강산에서 토함산으로 옮겨간 것처럼 한 곳에서 측정을 한 다음에 해당 지형지물이 보이는 다른 지점으로 이동을 해서 측정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4.
이제 도구 이야기를 좀 해보자. 먼저 지도. 지도는 브랜드를 고르느라 망설일 일이 없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공급하는 축적 1: 25,000이나 1: 50,000의 지형도를 구하면 된다. 1: 25,000의 축적은 지도상의 1센티미터의 실제 거리가 250미터이고 1: 50,000의 축적은 500미터이다. 2014년 6월 현재 국토지리정보원 홈페이지 상의 정보로는, 한국 영토를 전부 다 포함하(ㄹ 것으로 짐작되)는 1:25,000의 축적의 지도 수는 총 802장이며 단가는 3,100원이다. 곱하면 2,486,200원이다. 저걸 다 구비하는 건 말 그대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넉 장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 포맷으로도 판매한다.

지형도란 땅의 형세를 추상화한 일종의 2차원 그래프이다. 크고 둥그런 지구를 작고 납작한 종이 위에 쫘악 깔아뭉개 놓았으니 알고보면 이러저러한 속사정과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지형도에는 등고선이 있고, 이 등고선을 잘 보면 능선, 안부, 봉우리, 계곡, 사면 등의 지형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방위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지도를 손에 들고 실제로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쏘다니면서 ‘감’을 익히는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음은 나침반. “철필은 붓보다는 원시적인 도구이다. 그러나 붓질은 정질보다 더 편하다. 철필은 붓보다 구조적으로는 더 간단하지만 기능적으로는 더 복잡하다. 이것은 진보의 한 특징이다: 즉 모든 것은 기능적으로 더 간단해지기 위해 구조적으로는 더 복잡해진다.”(빌렘 플루서,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기능적으로 더 간단해지기 위해 구조적으로는 더 복잡해진”, 그러니까 사용하기 편하고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한 전문가용 나침반은, 비싸다. 최신 스마트폰 가격에 필적하는 것도 있다.

독도법용 나침반은 자석과 각도기가 한 몸에 붙어 있다. 나침반의 자석은 방위각의 기준이 되는 자오선을 찾기 위해 쓰고, 각도기는 자오선과, 중심점에서 목표점으로 긋는 반직선 사이의 각도를 측정하는데 쓴다. 실바 형식이 있고 군용 형식이 있는데 각각 장단점이 있다. 실바 형식은 방위각 분해능이 보통 2도 이며, 지도 위에 올려놓고 작업하기에 좋고, 군용은 분해능이 보통 1도이고, 가늠자가 있어 방위각을 읽기에 수월하다. 말로 해서는 모르고 써봐야 알 것이다. 나도 실바 형식 밖에 안 써봤으니 잘 모른다. 보통은 실바 형식을 많이 사용한다. 어느 것이든 상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방향이지 나침반 그 자체가 아니다. “드릴을 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구멍이다.”

5.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면 당황스럽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은 언제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하는 3대 존재론적 질문이 떠오른다. 문제가 절박할수록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기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치 철학은 나중에 하고 우선은 살아날 방도를 모색해 보자. 지도와 나침반과 방위각을 이용해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내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지금, 어디인지도 모르고 서 있는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하여 어디로 가야하는 지 좀 알아보자. 지도에 점 좀 찍어보자. 2차원 그래프의 좌표값을 알아보자.

하도 여기저기 많이 인용돼서 이제는 지겨운 느낌마저 있지만 나도 인용한다. 맥락은 없다. 루카치는 이렇게 말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가 저 글을 쓴 게 1914년이다.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밤하늘에 별이 많았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갈 길을 훤히 알려주는 시대에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한 구닥다리 독도법이라니. 모스 부호처럼 고리타분하다.

***
이 글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낸 독도법의 기본 개념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독도법의 ‘ㄷ’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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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자침이 정확히 자북점을 가리킨다고 믿고 있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자침을 따라가면 결국에는 자북점에 도달하겠지만, 최단 직선 경로를 통해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출처, 2014, 6, 28 덧붙임)

<파우스트> 제2부 제3막

연금술과 점성술에 조예가 깊은 파우스트 박사는 모든 이론은 잿빛이라는 둥 가끔가다 그럴듯한 드립을 치는 메피스토펠레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고대 그리스의 헬레네 미녀를 아내로 맞아 오이포리온 아들을 낳아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길렀는데 아 글쎄 이 불효자식이 좀 컸다고 나대지 말라는 부모 말 안 듣고 지가 무슨 이카루스라고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코스프레하다가 부모 발치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