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단어들

많은 일들이 오래 전 기억이었다. 작년이나 재작년 일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고독 자유 불면 사랑 문학 철학 혁명, 젊은 시절 그는 이런 뜨거운 말들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연애편지에 적었으나 말년에 그가 그 뜻을 온전히 아는 언어는 녹내장처럼 슬픈 말들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어디서든 삐뚜로 서 있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 있는 묘비였다.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가던 그의 관속에는 몇 개의 허망한 어휘들만 들어 있을 뿐, 가파른 문장 하나 들어 있지 않았다. 그 허망한 어휘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나의 패배

아내가 삶아준 국수를 먹으며 누들, 누들 그랬다. 이어 우든 찹스틱, 우든 찹스틱 하다가 발동이 걸리자 영어가 술술 나왔다. 이를테면 이런 품격 있는 문장들이. 마이 프레셔스 파더 이즈 존나리 핸썸, 이라거나 마이 푸어 마더 이즈 어 워먼. 식탁이 화기애매해진 가운데 아이들이 반응을 보였다. 막내도 영어를 술술 했다. 마이 파더 이즈 베리 베리 베리 낫 핸썸. 돼먹지 못한 놈이다. 공격을 안 할 수가 없다. 마이 리틀 보이 이즈 베리 토커티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막내는 말이 많았고 내게 지지 않으려 했다. 그렇다면 네가 모르는 단어를 말해주리라 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마이 푸어 리틀 선이즈 베리 이리테이팅. 이리테이팅을 알 수가 없으니 내가 이길 게 뻔했다. 그랬는데 아니었다. 내가 졌다. 내가 저 고상한 영어 문장을 독일식과 일본식을 포함한 그러니까 유창한 발음으로 말하는 순간 막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왓 더 헬! 이제 막 국수를 한 입 먹고 오물거리던 아내는 메두사 머리카락처럼 국수를 뿜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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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이야기—지식

이런 것도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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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무식하다는 건 모든 질문에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은 아닐텐데도 도깨비 방망이 열 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다섯을 머리에 뿔도 없는 따라서 한심한 인간들이 훔쳐갔다면 남아 있는 방망이는 모두 몇 개인가와 같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간단한 질문에조차 짐짓 모른다고만 대답하면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도깨비이므로 공주와 결혼시켜 달라고 날이면 날마다 줄지어 찾아오는 낯두꺼운 낮도깨비들을 상대하다보니 애당초 도대체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도깨비 왕국의 왕노릇이 너무 지겨워 떡두꺼비 같은 손주 하나 얻어 그 어린 것 재롱이나 보면서 또 한 백 년 소일이나 하겠다고 심심풀이 삼아 이런 일을 벌인 것이 후회가 아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천하의 도깨비 왕 체면에 대보름 달 밝은 밤에 노래의 숲에서 옥쇄 방망이를 세 번 두드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도깨비를 사위로 삼겠노라고 온 천하에 대고 내린 교지를 취소할 수도 없으니 기왕지사 이리 된 마당에 언젠가는 그럭저럭 쓸만한 녀석이 나타날 것이라는 마음으로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도깨비 빤스는 몇 년에 한 번 빨아입는 것이 좋은가와 같은 개중 중차대한 국사를 처리하는 틈틈이 무남독녀 외동딸의 남편감을 고르는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또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 데다가, 도깨비 문학, 도깨비 역사, 도깨비 철학 등 도깨비 인문학은 기본이려니와 도깨비 방망이 엔지니어링, 심지어는 머리에 뿔도 없는 따라서 한심한 인간들을 연구하는 도깨비 문화인류학까지 두루두루 섭렵하여 신랑감의 첫 번째 조건인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도깨비이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유식한 도깨비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는 것도 많고 진짜 무식은 단순히 모르는 것이 많은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며 그러한 무식은 오로지 배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그 까닭은 지식의 바람을 많이 불어넣을수록 무식의 풍선을 크게 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설명을 섞어가면서 비록 자신의 무식이 아직까지 많이 부족하기는 하나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천하제일의 무식한 도깨비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니 부디 공주와 결혼시켜 달라고 청하는, 더욱이 이목구비가 울퉁불퉁한 게 생긴 것도 근사한 도깨비가 나타나자 안 그래도 무식한 놈에게 금쪽 같은 딸을 내어주기가 싫었던 도깨비 왕은 그만하면 됐다 싶어 공주를 불러 드디어 공주가 원하는 신랑감을 찾았으니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손 없는 날을 잡아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 것이라고 말을 했는데, 이 말은 들은 공주가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자신에게는 사실 오래 전부터 혼인을 약조한 사내가 있었지만 이 사내가 하필이면 도깨비 왕국이 국법으로 혼인을 금하는 머리에 뿔도 없는 따라서 한심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국법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국법이 울어서 차마 부왕에게 말을 못하고 해결책을 마련할 때까지 그저 어떻게든 시간이나 벌어볼 요량으로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도깨비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생고집을 피웠던 것이라고, 그 동안 남모르게 속을 많이 태웠다고, 이제 다 털어놓으니 후련하다고, 그 남자 정말 괜찮다고, 머리에 뿔도 없는 따라서 한심한 인간에게 시집가면 정녕 아니 되는 것이냐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