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내 딸은 물론 나를 아빠라고 부른다. 아이가 말을 배워 나를 아빠라고 처음 불렀을 때 나는 감격했던가. (아니면 내가 네 아빠라는 걸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말라고 했던가.) 감격도 한두 번이지 계속 아빠로 불리우면 무감각해지게 된다. 내 딸이 나의 딸인 건 아주 당연한 일이어서 나는 내가 저의 아빠라는 사실을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사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내 스마트폰이 보이지않아 딸의 전화기를 빌려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적이 있다. 아이의 전화기에 내 번호가 단축키로 할당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할당돼 있다면 몇 번인지 알 리가 없는 나는 그 원시적인 기계로 내 번호를 차례대로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발신상태로 전환되는 딸의 휴대폰에 ‘아빠’라는 말이 떡하니 떴다. 그때다. 그때 나는 내가 내 딸의 아빠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맞다. 내가 이 녀석의 아빠였지, 아빠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조금 전에 수학여행 간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설악산 산신령이 아빠 친구니까 예의를 잘 갖추어 안부인사 정중히 여쭈라고 답신을 해주었다. 그러고나서 지금 아빠, 라고 고요하게 발음해보는 것이다.

오늘의 문장

“In theory, we could come up with a much larger system of algorithms which would enable us to solve the last layer in one algorithm. However, the number of algorithms one would need to learn is 1211.”

이론상으로는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마지막 층을 맞추도록 해주는 초대형 알고리즘 체계를 고안해 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익혀야 하는 알고리즘이 1211개다.

카페 리토스트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가 카페 차린다고 이름 지어달라고 하면 ‘카페 리토스트’라고 지어줄 것이다.

“‘리토스트’란 다른 나라 말로는 정확히 번역할 수 없는 체코 말이다. 그것은 벌려진 아코디언처럼 무한한 느낌을 나타내며 비탄.동정.후회와, 말할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감정을 모두 뭉뚱그려 넣은 말이다. […] 이런 경우에도 나는 세계의 어떤 말에서도 이 말에 대응하는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말이 없이 인간의 영혼을 이해하기란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건축학 개론>에서 승민이 서연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꺼져줄래” 였다. 상처받은 승민은 저런 모진 말로써 자기 안의 리토스트를 해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에 자기 아니면 죽고 못살 것 같던 승민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면서 졸지에 차인 서연의 리토스트는 더 가중되었다.

그런데 저런 이름으로 장사가 잘될까.

<건축학 개론>

봄비 내리는 금요일밤 따님을 모시고 영화관에 간다. 영화관에 가며 과제를 준다. 영화 줄거리를 다섯 문장으로 요약하라. 따님이 물으신다. 아빠, 우리 팝콘은 안 먹어요? 안 먹는다, 고 대답하는데 마음에 가볍게 지진이 인다. 약해지면 안 된다. 내가 지금까지 너 사준 팝콘값을 저축했으면 제주도에 땅을 샀을 것이다. 따님 옆에 남은 빈 자리 하나에도 영화 시작 직전에 관객이 비집고 들어가 앉는다. 영화를 본다.

(상영중)

영화가 끝나고 포스터가 죽 붙어 있는 긴 복도를 걸어나오는데 따님이 불쑥 말씀하신다. 이걸 어떻게 다섯 줄로 줄여? 난 못해. 맞다. 과제 내 준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까짓 거 요약하거나 말거나 내가 알 게 뭔가. 이십사 년 일 개월의 참회를 한 줄에 줄인 윤동주도 있는데 영화 한 편 다섯 문장으로 줄이는 게 뭐가 어렵다구. 팝콘 사줬으면 아까울 뻔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번 과제 쉽지 않겠다 싶다. 10대 소녀가 첫사랑 얘기를 어떻게 다섯 문장으로 줄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 나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다섯 문장도 너무 많다. 117분 짜리 영화를 이제 닳고 닳은—슬프다—나는 한 줄에 줄인다. “썅년”이 “썅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