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묵호 갈 거라고 가서 눌러 살 거라고 그러니 잘 있으라고 기다리지 말라고 하고 집을 나섰다가 한 나절만에 돌아오니 그래 묵호는 잘 갔다 왔느냐고 가보니 어떻드냐고 바다는 잘 있더냐고 고기는 많이 잡았느냐고 아내가 묻는다. 이번 묵호 드립은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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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한 글 하나, 흔해빠진 패러디 하나 맞으시죠? 고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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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미지다
못볼 걸 보고 말았다. 그게 벌써 언제적 영화인데 이제 와서 그걸 보고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녀는 없다. 그녀는 영화 속에만 존재한다. 그녀는 이미지다.
<<괴델, 에셔, 바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지음), 박여성(옮김), <<괴델, 에셔, 바흐>>, 까치, 1999(초판 1쇄), 2008(8쇄)
이 책은 인간의 추론을 기계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검토하고 설명한다. 전에 한번 읽으려다가 던져버렸던 책이라 이제 다시 던져버리면 내 생애에 다시는 들쳐볼 것 같지 않아서 꾹 참고, 오기로, 끝까지, 읽었다. 어떻게 보면 이 독서는 시간 낭비이고, 어떻게 보면 일종의 지적 자학이다. 골이 깊으면 산도 높으니 물론 지적 자극에도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 쉽게 말해 지금까지 내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할 것 같지 않은 그런 생각이 들어 있다. 가령, 바이올린을 파리채로 쓴다는 생각 같은 걸 내가 어찌 해보겠는가. 결론적으로 이런 책을 나처럼 어설프게 읽은 인간에게 남는 것은 지적 허영심일 것이다. 그러니 헛된 독서다.
더러 이해가 되거나 멋있어 보이는 구절이 나오면 따로 메모를 해두었다. 메모는 먹다 남긴 양주처럼 잘 키핑해 두었다가 다음 생에 연애할 때 써먹겠지만, 그 연애는 아마 쉽사리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호프스태더에 의하면 “지능은 패턴을 좋아하고 우연적인 것을 꺼린다.” 그는 괴델의 정리와 에셔의 그림과 바흐의 음악에서, 그리고 체계와 추론과 언어와 의미와 기호 따위에서 모종의 패턴을 발견한다. 그 패턴들은 재귀적이다. 즉 그것들은 스스로를 삼키거나, 도출하거나, 부정하거나, 지시한다. 다시 그것들은, 그러니까 쳬계와 추론과 언어와 의미와 기호 따위는 에셔의 그림처럼 소용돌이치고, 헝클어져 있다. 그 난리 속에서 과연 인간은 무엇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글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론의 모순 없는 공리체계들은 반드시 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포함한다”는 문장으로 요약되는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이해하기 위해 링크된 항목을 다 읽었다. 읽어만 봤다. 또 독서 중간 중간에 유튜브에서 바흐의 음악을 찾아 들었고, 한편으로는 ‘꿈속의 꿈속의 꿈’에 들어가 기억 이식 작전을 벌인 다음, ‘킥’을 통해 현실로 돌아오는 영화 <인셉션>의 설정을 이 책에 나오는, 체계의, 추론의, 논리의, 낮은 층위로 내려가는 푸쉬(push)와 높은 층위로 올라오는 팝(pop)이라는 용어에 대입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인가. 이 독후감은 무의미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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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는 무리수(無理數)를 무비수(無比數)라고 번역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건 나중에 자식들에게 꼰대짓할 때 써먹을 것이다.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수의 개념에 대하여 통상 무리수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것은 알다시피 irrational의 라틴어 어근인 ratio가 이성이라는 뜻을 가지기 때문에 만들어진 번역의 촌극이다. 그러나 ratio는 비율이라는 뜻도 가진다. 과학용어의 번역이 수학적 세계상을 얼마나 일그러뜨리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살아 있는 보기 때문에, 우리의 어린 학생들은 왜 그 수가 이성과 관련되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물론 나누어 떨어지지 않으니 이성적이지 않은 수라고 강변할 만도 하지만 말이다.” p. 512 각주
Ninjago
컴퓨터 하는 형아 옆에 앉은 3호. 갑자기 닌자고 노래를 부른다.
닌자고
닌 자 고
니인 자고
나안 컴퓨터 하고
형아가 한 마디 한다.
죽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