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왜 이러셔 나도 음악을 듣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구 오늘은 비명처럼 갈라지는 바이올린 소리를 바스러져라 껴안고 소통의 절벽에서 투신하고 싶다네

비닐봉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면, 오오 그대인가 정녕 그대는 나의 사랑을 초코파이해 줄 수 없나 모나리자, 본능적으로 돌아보는 우리집 아이들, 모나리자, 슬픈 수학은 싫어,

[영화] 모짜르트과 고래

모든 점포에 CCTV 설치! 어느 상가의 동쪽 출입구에 붙어 있는 말이다. 상가에 들어서던 나는 눈을 들어 모든 점포에 CCTV가 설치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뻥이다! 그저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니 혹시라도 도둑질할 생각일랑 애저녁에 품지를 말라는 경고를 과장해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1시간 수영후 10분간 휴식! 내가 다니는 수영장 벽면에 붙어 있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수영 시작을 알리는 안내 멘트는 매시 정각에 방송되고 10분간 휴식을 알리는 멘트는 매시 50분에 방송된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저 문구를 쓴 사람과, 그걸 떡하니 벽에 붙여놓은 사람과, 저렇게 붙여 놓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수영장을 운영하는 사람과, 이 모든 것을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무신경이 나는 짜증스럽기도하고, 부럽기도 하다.

경고하겠는데 당신은 이런 일에 관심끄고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거 심하면 병이다. 여기 한 소녀가 있다. 어릴 적에 그녀는 올림픽 중계방송을 시청하던 부모가 기록이 깨졌다(A world record is broken!)는 사실에 환호하는 걸 본다. 레코드 깨는 게 뭐가 어렵다고 저 난리야. 그게 그렇게 좋은 일이면 나도 깨뜨려 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안에 있던 레코드판들을 정원에 나가 깨뜨려 버린다.

언어에서 의미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언어를 문자 그대로literally 이해하는 이런 증세를 일컬어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이라 한다는 걸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처음 알았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자폐증의 일종인 신경질환으로 사회적.정서적 상호 교류에 문제를 일으”킨다. “장애는 보통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지만 성장 과정에서 더 많은 장애의 발달이 나나탄다. 이것은 성격상 사회 부적응과, 대화의 미숙함, 이상한 행동과 관심사에 대한 반복된 행동을 나타내며, 자극이나 환경에 대한 이상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저 소녀가 ‘모짜르트(라다 미첼)’다. 여기 또 한 남자(조쉬 하트넷)가 있다. 마찬가지로 자폐증을 앓고 있는 환자다. 그는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처럼 수를 천재적으로 다룬다. 그는 미치고 팔짝 뛰겠는 상황과 맞닥뜨리면 주차장에 가서 자동차 번호판의 숫자들을 보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영화는 둘이 만나 소통하고 사랑하는 얘기를 다룬다. 그 사랑은 눈물 나고 답답하고 아름답다.

경쾌한 음악과 남녀주인공의 수려한 용모가 감정이입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나라면 인물이 좀 덜 되는 주인공을 캐스팅해서 더 슬프게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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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링크 하나 걸어 둔다. “‘상황 인식적 어의(語意) 지각(context-aware semantic perception)’ 기능”이 “거의 마비상태”인 사람의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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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과거에 쓴 말을 액면 그대로 쓰면 웃긴다도 아스퍼거 증후군의 사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음.

02 소통의 법칙

저 산, 노을이 비치고
온몸에 금이 가요.
사방에서 노을이 떠요.
살고 싶어요.
사람이 죽으면 노을에 묻히나요?
─ 신대철, “처형 3” 中에서

우리는 모두 개체이다. 즉,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절대 나 너 아니고 너 나 아니다. 너도 나도 다 하나의 개체에 불과한 우리는 ─ 아니, 어쩌면 영원히 우리는 없으므로 ─ 너와 나는 오늘도 소통을 꿈꾼다. 그래. 소통은, 결국은 개체인, 개체일 수밖에 없는, 빌어먹을!, 우리 모두의 꿈이다.

그런데 소통은 해서 무엇 할 것인가? 네가 어느 날 본,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때 거기에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산문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구라를 풀고, 아, 악을 쓰고, 아아, 어쩌면 울고불고 하며 마침내는 나에게, 전후좌우 천지사방이 꽉꽉 막혀있는, 이 미련곰탱이 같은 나에게, 네가 본, 그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사람 환장하겠는, 그 지랄 같은, 타는 저녁노을을 보여주었다. 고맙다. 너 아니면 그 좋은 걸 내가 영 못 볼 뻔 했다. 그런데 그렇게 진저리치며 맨살로 이 불통의 세상을 박박 기며 소통은 해서 무엇 할 것인가? 온몸에 금이나 갈 것인가?

물론, 소통은 어렵다. 그래서 소통은 가치이고 의미이다. 제발 나를 알아줘. 제발 나를 읽어줘. 제발 내말을 들어줘. 제발 나를 이해해줘.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줘. 내가 표현하지 않아도 느껴줘. 제발. 제발. 제발. 야, 이 먹통아. 그게 아니야. 그건 오해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넌 몰라. 넌 말해줘도 몰라. 넌 도대체 눈 뜨고 뭐 본거야. 귀 달고 뭐 들은 거야. 오죽하면 아예 내 가슴팍과 네 가슴팍에 쇠 파이프 하나 팍 박아 서로 연결해 버리고 싶을까.

우리는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연애하지 못한다. 소통이란 ‘존재의 공유’이니 도무지 서로 공유할 게 개 코딱지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과는 손을 잡아도 전기가 찌릿찌릿 흐르기는커녕 후보자 유권자에게 악수 청하듯 아무런 느낌이 없고 외려 세균 옮을까 겁만 난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이런 사람과는 예쁜 것도 잘생긴 것도 돈 많은 것도 웃기는 것도 다 한철이다.

그렇다면 잘 통하는 사람과는 연애가 잘 될까? 그래야 하는데 문제는 이게 아닌 것 같다는 거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소통이 잘되는 사람에게 주고 뺨 맞은 적이 무릇 기하이며 소통 잘되는 도끼에게 발등 찍힌 적이 무릇 기하인가? 뭐시라? 당신은 그런 적이 없다? 잘났다. 정말. 팔뚝도 굵고 똥도 굵다. 이제부터 당신과 나, ‘우리’ 아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잘 알겠는데,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아, 아니다, 외로운 건 좀 청승맞으니, 당신이 얼마나 고독한지, 혹은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는지, 혹은 당신이 겉으로는 늘 웃고 있지만 알고 보면 그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나는 정말 ‘느무느무’ 잘 알겠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무관심한가. 어째서 눈길 한번 주지 않는가. 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가. 왜 내 손잡아 주지 않는가. 당신 왜 나에게 쌀쌀맞은가. 당신, 나쁘다. 백날 이래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거, 말짱 꽝이라는 거, 이거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서둘러 깨달아야 한다. 상대는 내가 저에게 갖는 그런 관심에 관심이 없다. 소통은 없다. 소통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어쩌란 말인가. 안 통해도 안되고 잘 통해도 안되면 그럼 어쩌란 말인가, 연애 한번 하지 못하고 처녀귀신 아니면 몽달귀신 노릇이나 잘 하라는 말인가, 하고 당신은 묻는다. 낸들 아나. 당신 연애 못하는 걸 왜 나한테 묻나. 그래도 연애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소통하지 말라. 함께 하라. 함께 노을 보고 함께 영화보구 함께 뒷골목 헤매고 함께 모의 하고 함께 궁리하고 함께 작당하고 함께 죄짓고 함께 살고 그래라. 그것 밖에 없다.

꼭 연애가 아니더라도 소통은 중요하다. 소통의 문제는 연애의 문제이기 이전에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 이걸 누가 알겠는가. 다만 이제 내가 알겠는 건 이거다. 안타깝지만 진실은 이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은 없다.

소통 疎通

내가 먹은 것을 네게도 먹여주고 싶은 것, 소통에의 욕망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좋아하는 그 옛날의 홍탁을 너는 냄새난다고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것을. 너 아구찜은 좋아하니? 아니면 비오는 날의 파전은 어때? 동동주는?

“무제(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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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이소, ‘무제(표류)’를 위한 드로잉 2000, 종이에 연필과 펜

[……]
이 세 번째 작품은 병에 실어 바다에 떠나 보내는 편지에 대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다시 각색한 것이다. 작가는 위성위치추적장치(GPS)를 플라스틱 병 안에 넣어 멕시코만에 떠나보낸다. 플라스틱 병 안의 GPS장치는 바다를 떠다니며 그 정확한 위치를 송신하고, 작가는 전시장의 벽에 그 여행의 경로를 표시한다. 표류하는 병의 예상할 수 없는 여행경로를 따라, 관객은 바다에서 떠다니는 병의 경험을 상상할 것이다. 이 작품은 유한하면서도 무한한 것이, 배터리가 소진되면 그 병은 우리의 머릿속 지도에서는 사라지지만 그것이 지구 위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 작품 “무제(표류)”가 바다의 파도 위에 떠다니는 병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 안에서만 존재하기를 원한다. 작가는 위의 설명이 바로 이 작품의 본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병을 띄운 직후 찍은 공허한 바다의 사진 한 장만을 남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작가가 병에 장착한 GPS장치는 단순히 위치파악을 위한 도구로서보다는 존재와 존재의 연결고리로서, 그리고 소통에 대한 초라한 희망의 상징으로서 인 것 같다. 만일 그가 단순히 병의 표류지도만 그리고자 했다면 야나기 유키노리가 마루 위에 개미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선 드로잉을 그렸던 것과도 흡사한 발상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배터리의 수명을 예상해 일주일이나 이주일 이상의 소통을 예상했지만 그 병은 인간의 조종과 예측을 비웃기라도 한 듯 2시간 22분 동안만 신호를 보내고 사라져 버렸다. 사실은 인간의 지식으로부터만 사라졌고, 지금도 멕시코만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예정되어진 ‘행방불명’의 컨셉트는 이 프로젝트를 더욱 개념적이면서도 상상의 풍경으로 만드는데, 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우리들 삶의 온갖 장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삶 자체의 무력함과 목적 없음이며, 사건과 사고로 가득한 우리 인생의 나약함이며, 또 인간의 의존성과 앞날에 대한 예측불허 같은 것이다.

─ 김선정(아트선재센터 부관장), http://www.foruma.co.kr/faWriter/View.asp?fNum=29

내가 혹은 당신이 저 병과 같아서 지금 어느 바다를 떠돌며 누군가를 향하여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병은 행방물병되고 소통은 두절되었다. 돌이켜보면 소통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날을 기점으로하여 나는 덜 괴로워지기 시작했던 거 같으다.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소통 따위가 다 무어란 말인가. 고백하는데 대부분의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당신들 탓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