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또 소주 당했다. 제법 많이 당했다. 도보로, 택시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소주 당했다. 더불어 글 안 쓴다고 구박 당하고, 깊이도 없이 이것저것 집적댄다고 면박 당했다. 어제는 소주당했는데…(일단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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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인의 표지
어제는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폐인이 되어버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소주를 박스 채 차에 싣고 다니며 마셔 댄다고 했다. 그와 절연했다는 한 사람은 자신이 몰던 차에서 그가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그래서일까? 첫 눈에 어떤 범상치 않은 기운이 그의 몸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표지는 철거되는 건물에 삐죽삐죽 솟은 철근 같은 거니까 금방 눈에 띈다. 어쩌면 그의 몸속에 축적된 알콜이 휘발하면서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오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음에 나를 만나면 혹시 내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오르지는 않는지 잘 관찰해 주기 바란다. 그때까지 많이 마셔 둬야겠다. 오늘 밤에도 닭발에 소주가 스치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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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동네 야산을 오르는데
해드랜턴 불빛 속으로 나방 한 마리 불쑥
날아 든다 또 그대인가 순간
나는 놀란다 이것이 헛것이다
12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
딸아이 단원평가 수학 시험지를 확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
그리고 권총 하나 장만해 두어야겠다는 생각
숲에는 처녀 귀신도 없고
숲에는 정령도 없고
나는 참고인인가 피의자인가
세상은 왜 나를 소환했는가
중환자실에서 잠시 의식이 돌아온 노인은
시집간 딸의 손에
나 간다
고 힘겹게 쓰고 갔다
저녁 먹고 동네 야산이나 오르다가
그러니까 이렇게 살다가
나도 그런 식으로 갈 것이다
저기가 비오는 밤 고슴도치를 암매장하고
소주를 부어준 곳이다
내 의식에는 저기 같은 곳이 곳곳에 있다
해드랜턴을 끈다
안구돌출 컨티뉴
아내가 소주 네 병을 사왔다. 손님을 치루려는 것이다. 둘째 녀석이 소주병을 만지작 거리며 묻는다.
“아빠, 이 거 뚜껑을 열고 휴지를 쑤셔넎은 다음에 휴지에 불을 붙이면 붙잖아?”
“그런데?”
“그럼 그걸 던지면 확 불이 붙어? 왜냐하면 술에는 알콜 성분이 있잖아?”
(허걱. 이 녀석이 벌써 화염병을…)
이후로도 불에 대한 대화가 이어지기는 했으나 여기까지만 적고, 옛 기억을 더듬는다. 뭐 이런 거.
“어깨동무를 가르쳐 줬더니 스크럼을 짜.
눈깔 나와 계속해. 안구돌출 컨티뉴.”
어찌 한 구절 아니 덧붙일 수 있으랴.
소주병을 보더니 화염병을 발명해.
눈깔 나와 계속해. 안구돌출 컨티뉴.
오늘 밤 나는 저 소주를 마실 수 있으니
소주병아,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푸르른 틈새>>, 문학동네, 2007
작가가 이상문학상을 타고 난 뒤에─아마도 이때다 하면서(어디 가겠는가? 나의 시니컬이)─ 재발간 된 소설책, 하여 1년여를 보관함에 담겨 있다가 얼결에 장바구니로 옮겨와 기어코 배달되어 온 책. 읽다 보니, 뭐야 이거 성장소설아냐?, 싶어 그제서야 뒷표지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젊음의 슬픔과 방황, 그 소진과 성숙의 의미를 독특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어쨌든 읽을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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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자고 일어난 휴학생 딸과 “낡은 소파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아버지, 라면 끓일까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낮술 하는 장면만 따로 떼어 단편 영화 하나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슬픈데 코믹한 영화.
“그러엄! 이기 말하자문 전골이라, 전골, 라면전골이라.”
아버지는 꿀꿀이죽처럼 잔뜩 풀어진 라면냄비에 숟가락을 꽂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오오, 라면전골. 그렇군요”
굴과 계란이 든 라면을 먹으며 아버지와 나는 자기 몫의 소주 한 병씩을 마셨다. 아버지와 나는 대화에서도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라면냄비와 소주병을 나누었듯 아버지와 나는 대화에서도 각자의 몫을 독백했다. 아버지는 당신만의 울분을 큰 소리로 토로했고 나는 나만의 상념을 중얼중얼 주워섬겼다.
“아……. 눈을 뜨자마자 소주를 마셔도 되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