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어쩌자는 것인가 천둥번개 치며 비 오는 새벽 검은 지렁이 한 마리 젖은 아스팔트 위를 (           ) 기어가고 있다 거리의 흔한 청소년이라면 저 괄호 안에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존나 병신 같이, 라고 넣을 것이다 지렁이 자신은 어떤 부사를 써서 자신의 실존을 기술할 것인가 가령 묵묵히, 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소신 있게, 라고 할 것인가 비 내리는 새벽 세 시 담배 사러 가는 길에 만난 지렁이에게 나는 어떤 수식어를 헌정해야 하는가 내 머리에 최초로 떠오른 단어는 지렁이가 아니라 나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 말이 이 글의 주제인데 나는 정작 그 치명적인 언어는 쓰지 못하고 있다

지렁이

비 그친 조깅 트랙을 횡단하는 지렁이
사람에게 밟힐까 조마조마해서
가던 길 멈추고 한참을 지켜주었다
부질 없어도 그냥 그러고 싶었다

지렁이

비오는 거리를 ‘지나가다’가 전화통화를 하며 지나갔다 하필이면 그때 그곳을 기어가고 있던 말 못하는 ‘기어가다’가 ‘지나가다’의 무심한 발에 밟혔다 순간 ‘기어가다’는 ‘몸부림치다’가 되었다가 이내 ‘꿈틀거리다’가 되었다가 천천히 ‘멈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