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 책들, 2010

작가님, 글쓰기를 마치고 외출을 하신다. “정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가는 도중에 작가는 갑자기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후닥닥 서재로 올라가서는 거기서 어떤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바꾸었다.” 천상 작가다.

작가님, 목하 외출중이시다. “그는 눈은 카메라, 귀는 녹음기라고 생각하며 걸었다.” 병이다. 직업병.

작가님, 몸은 타자기 앞을 떠나셨으나 마음은 그러질 못했다. 생각이 많고, 질문이 많다. 그리하여 “이러한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나를 격리시키고 옆으로 밀어 놓으면서 사회인으로서 나의 패배를 시인했다. 나는 평생 동안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제시켰다. 그들의 비밀을 잘 알고 있는 내가 환영받고 포옹받으며, 여기 사람들 사이에 끝까지 앉아 있을지라도 나는 결코 그들에게 속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야 작가님이시지.

작가님, 외출에서 돌아오셨다. 피곤하시다. 피곤하면 누워 양이나 세시지 누가 작가 아니랄까봐 또 생각의 탑을 쌓으신다.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 […]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누가 내게 말하는가?” 맨날 묻기만 하면 뭐하나? 써야지. 써야 작가지.

작가님, 하물며 또 다짐도 하신다. “일에 실패하지 말자고. 다시는 언어를 잃어버리지 말자고.”

얇은데 지겹게 읽었다.

소망 없는 불행

페터 한트케(지음), 윤용호(옮김),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2002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 그는 빔 벤더스와 함께 <<베를린 천사의 시>>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다. — 는 1942년 생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스물 아홉이었을 때, 그러니까 “1971년 11월 18일, 목요일”에 “모든 식구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고 그 다음 날 자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페터 한트케는 어머니의 삶을 썼다. 그녀는 “소망 없는 불행”을 살았다.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치명적인 일이었다.”

남편 — 페터 한트케의 친부는 아니다. 그는 이 사람을 어머니의 남편이라고 칭했다. — 은 아내에게 소망이 되지 못했다.

“남편 모르게 그녀는 꼬챙이로 아이 하나를 유산 시켰다.”

“겨울이 되어 건축 일이 없으면 실업 보조금이 지급되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그녀는 그를 찾아 이 술집 저 술집을 뒤지고 다녔고 그럴 때면 그는 고소하다는 듯 악의에 가득 찬 채 그녀에게 남은 돈을 내보이곤 했다. [……] 두 사람 다 집요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어 <짐승 같은 놈! 짐승 같은 놈!> 하면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던 말을 하면 그 말 때문에라로 그는 그녀를 제대로 팰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얻어 맞을 때마다 잠깐씩 그를 비웃었다. [……] 이불 속에 있는 아이들은 그저 밀치는 소리, 씩씩대는 소리, 때로는 찬장 속의 그릇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침대에 남편은 기절한 듯 누워 있었고 아내는 잠자는 척하며 눈을 감고 있었으며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몸소 아침 준비를 했다.”

“그들이 함께 늙어간다는 것이 그녀를 감동시키지는 않았으나 겉으로는 사는 걸 편하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가 더 이상 그녀에게 손찌검을 하지도, 그녀를 못살게 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참된 의미에서 함께였던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멀어지지도 않았다.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 남편은 잠잠해졌단다.> 그녀 역시 자신이 그에게 평생토록 하나의 불가사의였다는 생각을 하며 그와 함께 보다 잠잠히 살았다.”

자식도 그녀에게 소망이 되지 못했다.

“나는 이미 오로지 나만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팔월 중순에 나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고 그녀를 혼자 남겨 놓았다. 그후 몇 달 동안 나는 작품을 썼고 그녀는 가끔씩 소식을 전해 왔다.
<내 머릿속에선 무언가 윙윙댄단다. 견디기 힘든 날이 많다.>”

정치도 그녀에게 소망이 되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이 하라는 대로, 혹은 남편의 고용주이자 그녀의 오빠가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하지 않고 사회당에 투표했던 것이다.[……] 꿈속에서나 출구를 찾을 만큼 억압되어 있었던 섹스에 대한 혐오감과 안개로 축축해진 침대 시트, 꾀죄죄한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 쓴 채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생각에 잘 못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 그리고 어떤 정치가가 그녀에게 그걸 설명해 줄 수 있었을까? 또 어떤 말로?
정치가들은 다른 세계에 살았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질문을 해도 그들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할 뿐이었다.”

자살하기 얼마 전 신경쇠약증에 걸린 그녀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모든 것을 끝까지 생각할 만큼 논리적이지 못하고 머리가 아프단다. 머릿속이 윙윙거리고 때론 휘파람 소리까지 들려와 더 이상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견딜 수가 없구나.>”

부음을 받고 작가는 장례식에 참석하러가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거였어. 그거였어. 그거였다니까. 아주 좋아. 아주 좋아. 아주 좋다니까.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그녀가 자살을 했다는 데 긍지를 느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억은 체계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파편이다. 페터 한트케는 말미에 그런 파편들을 몇 개 늘어 놓았다.

“어머니는 지나가면서 자주 침으로 재빨리 아이들의 콧구멍과 귀를 닦아주곤 했다. 나는 항상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침 냄새가 싫었다.”

“한번은 등산 모임에서 그녀가 오줌 누려고 일행으로부터 빠져나간 적이 있었다. 그게 너무 창피해서 내가 엉엉울자 그녀는 오줌 누러 가지 못했다.”

“그녀가 매일 하던 사소한 일, 특히 부엌에서 일을 하던 그녀에 대한 나의 고통스런 추억.”

독후감 끝에 내 자신의 파편을 몇 개 보탤까 하다가 그만 둔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03(1쇄), 2004(2쇄)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더 많은 음악,
하고 목소리는 말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이름은 없다. 그냥 M이다. 이름이 M이라고 깔보면 안된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의 이름은 이름 석자 다 드러나도 나에게는 무의미한 “임의적 기호”에 지나지 않지만, 나와 관계가 있는 어떤 사람의 이름은 영문 이니셜 하나에도 내 전 존재를 떨게 하는 힘이 있으니까. 그러면 M은 누구인가? M이 ‘더 많은 음악’이라고 말한 목소리이다. M은 “언어학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음악에 미쳐있는 영혼”이었으며 나의 독일어 개인교습교사였다. 그러나 M의 독일어 교습방법은 “이제 간신히 독일어 ABCD 문법 교본을 반 정도만 마스터했을 뿐인 나에게”는 너무 어렵다. 이런 식이다. 내가 한 페이지 정도를 소리 내서 읽고나면 M이 그 중에서 하나의 단어나 문장을 골라 설명을 한다. 장황하게. 길게.

“황량하다, 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있어? 모른다고? 그것은 말이야, 눈에 보이는 특별한 것이 없다,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무책임하고 형식적인 설명일 뿐이야. 눈에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황량할 수도 있어. 좀 다른 거야. 예를 들자면 마치 사막처럼 모두 같은 색으로 보인다든지, 건물은 많으나 살아 있는 것은 전갈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든지, 모두 떠나가 버렸다든지, 어디에도 우물이 없다든지, 기차역이 너무 멀다든지 말이지. 지루하다거나 무미건조하다는 것과는 좀 다르게 생각될 수 있어. 그런데 그는 왜 황량하다, 라고 했을까. 삭막하다, 라거나 공허하다, 라는 단어 대신에 말이지. 그 단어들을 모두 넣어서 아무 문장이나 만들어 얘기해주겠어? 그리고 풍경을 묘사하는 다른 단어들 중에 생각나는 다른 것이 있으면 아무거나 예를 들고 그것과 비교하면서 설명해줄 수 있겠어?”

이상적인 교습법이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다. 그러니 독일어 공부의 진도가 제대로 나갈 리가 없다. 연애면 또 몰라도. 해서 나는 M에게서 독일어는 그만 배우고 대신에 M과 사랑을 한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쉽지가 않다. 나는 사정상 한국에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M에게 세 달 있다가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할 수는 있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둘은 갈등 끝에 헤어진다. 아프다.

새삼스럽게 묻는다. 사랑은 대체 무엇인가? 예전에 나는 ‘사랑은 커뮤니케이션이다.’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 이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배수아는 언어를 사용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이때의 언어의 문제는 사용하는 언어가 모국어냐 외국어냐의 문제는 아니다. M이 ‘나’에게 가르쳐주고자 했던 언어, 즉 ‘보편적’인 언어의 문제이다. 이때 보편적 언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고 정신이며” “인종적인 차이나 개체간의 선천적인 차이보다도 더욱 보편적”인 언어를 의미한다.

언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음악”으로. 그러나 역시 한계는 있다. 그 한계는 무엇으로 극복한단 말인가. 어려운 문제다. 아무려나 당신은 쇼스타코비치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그러니 나는 이 소설 혹은 에세이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사랑은 다 끝났는데 그래도 나는 책상에서 쓴다. 이 책상이 이 소설의 제목인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다. “내가 M에게 무엇인가 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내 책상은 그것이 어디에 있는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가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그대로 옮긴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게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배수아. 이상한 작가다. 묘한 매력이 있는데 그렇다고 깊게 빠져들게 되지도 않는다. 끝으로 인상 깊은 구절 하나: “쓰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일단 쓰기 시작하는 거야. 무척 간단하잖아.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