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푸르른 틈새>>, 문학동네, 2007

작가가 이상문학상을 타고 난 뒤에─아마도 이때다 하면서(어디 가겠는가? 나의 시니컬이)─ 재발간 된 소설책, 하여 1년여를 보관함에 담겨 있다가 얼결에 장바구니로 옮겨와 기어코 배달되어 온 책. 읽다 보니, 뭐야 이거 성장소설아냐?, 싶어 그제서야 뒷표지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젊음의 슬픔과 방황, 그 소진과 성숙의 의미를 독특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어쨌든 읽을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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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자고 일어난 휴학생 딸과 “낡은 소파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아버지, 라면 끓일까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낮술 하는 장면만 따로 떼어 단편 영화 하나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슬픈데 코믹한 영화.

“그러엄! 이기 말하자문 전골이라, 전골, 라면전골이라.”
아버지는 꿀꿀이죽처럼 잔뜩 풀어진 라면냄비에 숟가락을 꽂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오오, 라면전골. 그렇군요”
굴과 계란이 든 라면을 먹으며 아버지와 나는 자기 몫의 소주 한 병씩을 마셨다. 아버지와 나는 대화에서도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라면냄비와 소주병을 나누었듯 아버지와 나는 대화에서도 각자의 몫을 독백했다. 아버지는 당신만의 울분을 큰 소리로 토로했고 나는 나만의 상념을 중얼중얼 주워섬겼다.

“아……. 눈을 뜨자마자 소주를 마셔도 되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지음), 김욱동(옮김), <<앵무새 죽이기>>, 문예출판사, 2003(1판 10쇄)

나이 들어서 읽는 성장소설은 참 맹숭맹숭하다. 끝.

p.s.
이를테면, 네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낮술이라도 한 잔 걸쳤을지도 모르겠다.

<<앵무새 죽이기>>를 보면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는 구절이 나오지…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 저 말을 인용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앵무새 죽이기>>를 보면 “언젠가 아빠는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는 문장이 나오지…

그러나 사실은 이것도 부족하다. 이렇게 해야한다.

<<앵무새 죽이기>>를 보면 이런 말이 나와. 들어봐. “2학년은 썰렁했지만 오빠는 내가 상급반이 되면 학교 생활이 좀 나아질 거라고 했다. 오빠도 처음에는 그랬지만 6학년에 올라가서야 뭔가 가치 있는 것을 배운다고 했다. 오빠는 6학년이 되면서부터 마음에 들어했다. 짧게나마 이집트 시대를 배웠는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 오빠는 한 팔을 앞으로 내밀고 다른 한 팔은 뒤로 뻗치고 한 발을 다른 발 뒤에 놓은 채 몸을 낮추고 한 참을 걸어갔다. 오빠 말로는 이집트 사람들이 그렇게 걸었다는 거다. 그런 식으로 걸어다녔다면 그들이 어떻게 무슨 일인가를 했겠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오빠는 이집트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발명해냈다고 설명했다. 화장지도 발명해냈고, 영원히 썩지 않는 미라도 발명해 냈고 말이다. 그들이 그런 것들을 발명해내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물었다. 언젠가 아빠는 나에게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중에서 내가 인용하고 싶은 구절은 말이지 이 부분이야. 즉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는 부분 말이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니?

이를테면,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형용사를 빼버리는 일은 쓸쓸한 일이다. “그림자”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