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지음), 윤용호(옮김),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2002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 그는 빔 벤더스와 함께 <<베를린 천사의 시>>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다. — 는 1942년 생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스물 아홉이었을 때, 그러니까 “1971년 11월 18일, 목요일”에 “모든 식구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고 그 다음 날 자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페터 한트케는 어머니의 삶을 썼다. 그녀는 “소망 없는 불행”을 살았다.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치명적인 일이었다.”
남편 — 페터 한트케의 친부는 아니다. 그는 이 사람을 어머니의 남편이라고 칭했다. — 은 아내에게 소망이 되지 못했다.
“남편 모르게 그녀는 꼬챙이로 아이 하나를 유산 시켰다.”
“겨울이 되어 건축 일이 없으면 실업 보조금이 지급되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그녀는 그를 찾아 이 술집 저 술집을 뒤지고 다녔고 그럴 때면 그는 고소하다는 듯 악의에 가득 찬 채 그녀에게 남은 돈을 내보이곤 했다. [……] 두 사람 다 집요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어 <짐승 같은 놈! 짐승 같은 놈!> 하면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던 말을 하면 그 말 때문에라로 그는 그녀를 제대로 팰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얻어 맞을 때마다 잠깐씩 그를 비웃었다. [……] 이불 속에 있는 아이들은 그저 밀치는 소리, 씩씩대는 소리, 때로는 찬장 속의 그릇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침대에 남편은 기절한 듯 누워 있었고 아내는 잠자는 척하며 눈을 감고 있었으며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몸소 아침 준비를 했다.”
“그들이 함께 늙어간다는 것이 그녀를 감동시키지는 않았으나 겉으로는 사는 걸 편하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가 더 이상 그녀에게 손찌검을 하지도, 그녀를 못살게 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참된 의미에서 함께였던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멀어지지도 않았다.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 남편은 잠잠해졌단다.> 그녀 역시 자신이 그에게 평생토록 하나의 불가사의였다는 생각을 하며 그와 함께 보다 잠잠히 살았다.”
자식도 그녀에게 소망이 되지 못했다.
“나는 이미 오로지 나만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팔월 중순에 나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고 그녀를 혼자 남겨 놓았다. 그후 몇 달 동안 나는 작품을 썼고 그녀는 가끔씩 소식을 전해 왔다.
<내 머릿속에선 무언가 윙윙댄단다. 견디기 힘든 날이 많다.>”
정치도 그녀에게 소망이 되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이 하라는 대로, 혹은 남편의 고용주이자 그녀의 오빠가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하지 않고 사회당에 투표했던 것이다.[……] 꿈속에서나 출구를 찾을 만큼 억압되어 있었던 섹스에 대한 혐오감과 안개로 축축해진 침대 시트, 꾀죄죄한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 쓴 채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생각에 잘 못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 그리고 어떤 정치가가 그녀에게 그걸 설명해 줄 수 있었을까? 또 어떤 말로?
정치가들은 다른 세계에 살았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질문을 해도 그들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할 뿐이었다.”
자살하기 얼마 전 신경쇠약증에 걸린 그녀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모든 것을 끝까지 생각할 만큼 논리적이지 못하고 머리가 아프단다. 머릿속이 윙윙거리고 때론 휘파람 소리까지 들려와 더 이상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견딜 수가 없구나.>”
부음을 받고 작가는 장례식에 참석하러가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거였어. 그거였어. 그거였다니까. 아주 좋아. 아주 좋아. 아주 좋다니까.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그녀가 자살을 했다는 데 긍지를 느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억은 체계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파편이다. 페터 한트케는 말미에 그런 파편들을 몇 개 늘어 놓았다.
“어머니는 지나가면서 자주 침으로 재빨리 아이들의 콧구멍과 귀를 닦아주곤 했다. 나는 항상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침 냄새가 싫었다.”
“한번은 등산 모임에서 그녀가 오줌 누려고 일행으로부터 빠져나간 적이 있었다. 그게 너무 창피해서 내가 엉엉울자 그녀는 오줌 누러 가지 못했다.”
“그녀가 매일 하던 사소한 일, 특히 부엌에서 일을 하던 그녀에 대한 나의 고통스런 추억.”
독후감 끝에 내 자신의 파편을 몇 개 보탤까 하다가 그만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