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르 쇼펜하우어(지음), 김욱(옮김), <<쇼펜하우어 문장론>>, 지훈, 2005.12.26(초판 1쇄), 2008. 2. 29(초판 6쇄).

쇼펜하우어는 헤겔이가 몹시 꼬왔다. 별것도 없는 놈이 잘 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깠다.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보자.

“이 같은 목적[무의미한 단어를 사상으로 위장한 후 독자의 지갑을 열게 하려는]을 달성하고자 그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를 둘러대고, 복잡한 부호 등을 활용해 마치 지성인인 것처럼 행세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결코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102쪽)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호주머니 속에 이런 종류의 가면이 수도 없이 저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현상이 독일에서만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에 이런 가면을 소개한 장본인은 피히테였고, 셀링이 완성했으며, 헤겔을 통해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그 매출은 엄청난 수치를 자랑하고 있다.” (103쪽)

“나[쇼펜하우어]는 칸트에서 중단된 이 궤도를 다시 한번 연장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칸트와 나의 중간에 해당되는 피히테, 셸링, 헤겔 같은 사이비 철학자에 의해 주전원의 원리가 완성되어버렸다. 여기서 그들과 함께 달린 일반 독자들은 이 끝없는 원운동의 출발선상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 처참한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213-214쪽)

쇼펜하우어는 시니컬한 사람이다. 내가 받은 인상이 그렇다. 당대의 베스트셀러 따위에 눈돌리지 말고 고전을 읽으라 하고, 사색하라 하고 간결하게 쓰라 하고, 그랬다.

옮긴이는 “이 책은 쇼펜하우어 만년(63세)의 저작인 인생론집 <<여록과 보유 Parerga und Paralipomena>>(1851) 중에서 사색, 독서, 저술과 문체에 관한 부분을 옮기고 제목을 <<쇼펜하우어 문장론>>으로 정했음을 밝혀둔다”라고  밝혀두었다.

에릭 호퍼(지음), 방대수(옮김),<<길 위의 철학자>>, 2014(개정판1쇄), 이다미디어

“나는 1920년 4월에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했다.”
“하룻밤 사이에 나는 온상에서 빈민가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저축한 돈이 얼마간 있어서 나는 1년 동안 그 돈을 쓰면서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1년이라는 세월은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25센트를 주고 다량의 수산염을 샀다. 그래서 [자살]준비는 하루 만에 끝났다.”
“나는 자살을 감행하지 않았지만, 그 일요일에 노동자는 죽고 방랑자가 태어났다.”
“나는 다시 길 위로 돌아갔다.”
“나는 길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수확철이 다가오자 나는 그녀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버클리를 떠났다.”

훌륭하신 분이다. 이렇게 늘 떠나셨다. 그리고 늘 읽고 늘 쓰셨다.

“어느해 나는 산 위로 올라가야 했는데, 쌓인 눈에 오랫동안 발이 묶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일이 없는 동안에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읽을거리를 충분히 준비하기로 했다. 나는 1,000페이지 정도의 두꺼운 책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두껍고 활자가 작고 그림이 없으면 어떤 책이건 상관없었다. 나는 헌책방에서 그런 책을 찾아 1달러를 주고 샀다. 제목에 눈을 돌린 것은 책값을 치르고 난 뒤였다. 표지에는 <<미셀 몽테뉴의 수상록 Essays of Michel de Montaigne>>이라고 적혀 있었다. 에세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몽테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발이 묶일 것이라는 예감은 적중했고, 그래서 그는 몽테뉴를 읽는다. “3번이나.” “그 책의 언어는 정확했고” 그는 “훌륭하게 다듬어진 문장속에서 독특한 매력들을 발견했다.”

날이 풀리고 하산하신 이분, 이제 입만 열면 몽테뉴를 인용하신다. “동료들도 좋아했다. 여자나 돈, 동물, 음식, 죽음 등 어떤 것에 대해서건 논쟁이 벌어지면 그들은 ‘몽테뉴는 뭐라고 말했나?라고 물을 정도였다.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그 구절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었다.”

“몽테뉴는 뭐라고 말했나?” 나는 이런 장면이 좋았다.

<파우스트> 제2부 제3막

연금술과 점성술에 조예가 깊은 파우스트 박사는 모든 이론은 잿빛이라는 둥 가끔가다 그럴듯한 드립을 치는 메피스토펠레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고대 그리스의 헬레네 미녀를 아내로 맞아 오이포리온 아들을 낳아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길렀는데 아 글쎄 이 불효자식이 좀 컸다고 나대지 말라는 부모 말 안 듣고 지가 무슨 이카루스라고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코스프레하다가 부모 발치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소설, 묵호를 아는가, 심상대

나 묵호 갈 거라고 가서 눌러 살 거라고 그러니 잘 있으라고 기다리지 말라고 하고 집을 나섰다가 한 나절만에 돌아오니 그래 묵호는 잘 갔다 왔느냐고 가보니 어떻드냐고 바다는 잘 있더냐고 고기는 많이 잡았느냐고 아내가 묻는다. 이번 묵호 드립은 실패다.

<<괴델, 에셔, 바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지음), 박여성(옮김), <<괴델, 에셔, 바흐>>, 까치, 1999(초판 1쇄), 2008(8쇄)

이 책은 인간의 추론을 기계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검토하고 설명한다. 전에 한번 읽으려다가 던져버렸던 책이라 이제 다시 던져버리면 내 생애에 다시는 들쳐볼 것 같지 않아서 꾹 참고, 오기로, 끝까지, 읽었다. 어떻게 보면 이 독서는 시간 낭비이고, 어떻게 보면 일종의 지적 자학이다. 골이 깊으면 산도 높으니 물론 지적 자극에도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 쉽게 말해 지금까지 내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할 것 같지 않은 그런 생각이 들어 있다. 가령, 바이올린을 파리채로 쓴다는 생각 같은 걸 내가 어찌 해보겠는가. 결론적으로 이런 책을 나처럼 어설프게 읽은 인간에게 남는 것은 지적 허영심일 것이다. 그러니 헛된 독서다.

더러 이해가 되거나 멋있어 보이는 구절이 나오면 따로 메모를 해두었다. 메모는 먹다 남긴 양주처럼 잘 키핑해 두었다가 다음 생에 연애할 때 써먹겠지만, 그 연애는 아마 쉽사리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호프스태더에 의하면 “지능은 패턴을 좋아하고 우연적인 것을 꺼린다.” 그는 괴델의 정리와 에셔의 그림과 바흐의 음악에서, 그리고 체계와 추론과 언어와 의미와 기호 따위에서 모종의 패턴을 발견한다. 그 패턴들은 재귀적이다. 즉 그것들은 스스로를 삼키거나, 도출하거나, 부정하거나, 지시한다. 다시 그것들은, 그러니까 쳬계와 추론과 언어와 의미와 기호 따위는 에셔의 그림처럼 소용돌이치고, 헝클어져 있다. 그 난리 속에서 과연 인간은 무엇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글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론의 모순 없는 공리체계들은 반드시 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포함한다”는 문장으로 요약되는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이해하기 위해 링크된 항목을 다 읽었다. 읽어만 봤다. 또 독서 중간 중간에 유튜브에서 바흐의 음악을 찾아 들었고, 한편으로는 ‘꿈속의 꿈속의 꿈’에 들어가 기억 이식 작전을 벌인 다음, ‘킥’을 통해 현실로 돌아오는 영화 <인셉션>의 설정을 이 책에 나오는, 체계의, 추론의, 논리의, 낮은 층위로 내려가는 푸쉬(push)와 높은 층위로 올라오는 팝(pop)이라는 용어에 대입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인가. 이 독후감은 무의미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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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는 무리수(無理數)를 무비수(無比數)라고 번역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건 나중에 자식들에게 꼰대짓할 때 써먹을 것이다.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수의 개념에 대하여 통상 무리수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것은 알다시피 irrational의 라틴어 어근인 ratio가 이성이라는 뜻을 가지기 때문에 만들어진 번역의 촌극이다. 그러나 ratio는 비율이라는 뜻도 가진다. 과학용어의 번역이 수학적 세계상을 얼마나 일그러뜨리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살아 있는 보기 때문에, 우리의 어린 학생들은 왜 그 수가 이성과 관련되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물론 나누어 떨어지지 않으니 이성적이지 않은 수라고 강변할 만도 하지만 말이다.” p. 51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