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네거리, 베레모를 쓴 구부정한 노인이 은빛 스텐 카트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카트에는 검은색 확성기가 실려 있다. 풍경이 기이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확성기에 붉은색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다. 죄 지은 자 많은 거리에서 천국과 지옥을 외치러 가시는 길인가. 어르신, 날도 쌀쌀한데 감기조심 하세요. 아무개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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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꼰대
그대를 사랑합니다, 를 보다가 옆에서 훌쩍거리는 고3대우 중1 딸에게, 지금 네가 느끼는 그런 감정을 파토스라고 하는 거야, 영어로는 pathos라고 쓰고 페이소스라고 읽기도 한단다, 라고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화석화 된 꼰대인 것이다.
파라오 원정대
1.
형, 구슬 옥 자도 쓸모가 있다.
뭔데?
으응, 자리 좌 자와 합쳐서 옥좌.
2.
이야기의 힘은 강하다. 아이가 요즘 들어 부쩍 레고, 레고 하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이야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레고에 닌자 이야기를 더한 닌자고에 몰입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이집트로 고고학 탐험씩이나 떠나고 계시다. (앞문장의 주어는 막내다. 요새는 주어가 없다고 시비 거는 분들이 믾아서 이렇게 괄호 열고 쉴드 친다.) 이름하여 파라오 퀘스트. 이 녀석아, 파라오 다 죽고 없거든!
옛날 어떤 시인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신문 보는 더리한 모습을 시로 승화시켰다. 그러니 어쩌면 변기 위에 앉아 아이폰으로 한 모음, 한 자음, 정성스럽게, 눈물겨운 부정을 타이핑하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도 어쩌면 한 폭의 아름다운 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