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버스

분당과 서울을 오고 가는 9401번 좌석버스에는 아침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과 실업자와 과거 실업자와 장차 실업자들이 올라탄다. 이들은 다시 자리에 앉아 가는 노예와 통로에 서서 가는 노예로 신분이 나뉜다. 몇몇 노예들은 아이폰을 꺼내 640 x 480 크기의 창을 통해,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노예들은 그냥 잔다. 출근 시간이면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버스전용차로는 노예버스전용차로가 된다. 자도, 자도, 자도, 서울은 멀다. 5월의 아침 햇살이 눈부셔 지, 지, 지, 지, 지, 나는 잠을 깬다. 부조리는 한물 갔기 때문에 내가 뫼르소처럼 살의를 느꼈을 리는 만무하다. 요새는 <나는 가수다>가 대세이니, 산천이 의구한 것과도 같이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은 여전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너, 가 없으니 내 인생은 전쟁 같지도 않고 내 사랑은 위험하지도 않다, 고 생각하기로 한다. 오늘 아침에는 종로2가  YMCA 앞 버스 정류장에서 아침마다 빵을 먹던 노숙자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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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 전에 아이폰에 끄적거려 둔 것

삐뚜러질테다

어제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아내의 문자를 받았다.

“언제 와?”

나는, 아, 자나깨나 오로지 나만을 애정하시는 곱디고우신 나의 아내님께서 이적지 아니 주무시고 이 미천한 남편을 기다리고 계시는구나. 포 더 피스 오브 올 맨카인드, 얼른 집에 가야겠다, 고 생각하고, 마시던 술을 계속 마셨다. 대화는 즐거워. 집에 가면 또 죽겠구나.

술자리를 파하고 장마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서울 어느 거리에 한 사내를 쓸쓸하게 남겨두고 축지법을 시전해 가면서 오백리 길을 걸어 집에 도착하니 아내님은 주무시고 계시었다. 나는 샤워하고 자야지 생각하고, 샤워 안 하고 그냥 잤다.

아침이다. 간밤에 별일 없었겠지. 습관처럼 아이폰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다가 어제 밤에 아내가 보냈던 문자를 다시 보고 크게 좌절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아이패드 언제 와?”

장마비 내리는 일요일

(전략)

언: 난 빵점 맞은 건 없어. 하지만 빵점 맞는 것도 재능이야.

(후략)

오호, 그러셔? 미안하다. 그런 재능을 물려주질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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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정리하는 과정 자체가 공부이기 때문에 물고기에도 중금속이 남아 있을 수 있어, 라고 방금 내가 말했다고 아들녀석이 킬킬 거렸다. 그러자 나머지 두 놈도 좋다고 웃어댔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기실 내 머리 속에는 녀석들의 질문에 답하는 두 문장이 동시에, 그러니까 소위 대위법적으루다가 떠올랐던 것 뿐이다. 나는 하나인데 세 놈이 동시에 질문을 해댈 때는 저런 정신분열적 사고가 아니면 대처가 안 된다는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