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제법 땀을 흘려가며 한창 낫질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이거 마시세요, 한다. 허리 펴고 뒤돌아보니 어느 모르는 예쁜 여자 아이가 종이컵을 내민다. 마셔보니 시원한 물이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아니 이거 순 맹물이잖아, 소주를 달라고, 소주를, 소주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한다. 여자 아이는 별 이상하고 한심한 어른 다보겠다는 표정으로, 아니 이 시간부터 술을 마시면 어떡해요, 하더니 저만치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벌초가 끝나고 지루한 문중회의도 끝나고 묘역 아래 느티나무 숲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시간, 아까 그 여자 아이, 부지런히 잔심부름을 하고 있다. 나는 이승철의 사랑하고 싶어, 를 흥얼거린다.

메모—2013년 8월

—하느님, 오늘도 이 유니버스의 대소사를 몸소 챙기시느라 정신 없이 바쁘시겠지만 축구장 네 배 만하게 고난이 보석이라고 써붙여놓은 저기 저 대로변 교회에 더 많은 고난을 보내주소서. 아멘

—물론 사물은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을 수 있다. 거울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생일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아들에게, 순간적으로, 그게 니가 원하던 거냐, 라고 물을지 아니면 니가 원하던 게 그거냐, 라고 물을지 망설이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