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파일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

중세풍 성당이 그려져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면 갖가지 모양의 퍼즐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퍼즐 조각들이 어두컴컴한 상자 속에서 이 세계로 나오는 문이 열리기를, 무슨 개벽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학교도들 모양 기다려 왔을 리는 없지만 나는 인사 치레로 그동안 오래 기다렸다는 둥, 늦게 와서 구하러 와서 미안하다는 둥, 괜스레 이말 저말 둘러대는 것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퍼즐만 보면 굽신거려야 하나.

퍼즐을 쏟을 때는 잠시 망설여야 한다. 거실에 평상을 떡하니 펼쳐 놓고 그 위에 쏟자니 며칠 동안 걸리적거릴 게 뻔하고, 그렇다고 비좁은 책상 위에서 맞추자니 능률이 제대로 오르지 않을 뿐더러 그 동안에는 책상에서 다른 일은 전혀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제일 좋은 것은 퍼즐 조립 전용 작업실을 갖추는 것이다. 여보, 우리 넓은 집으로 이사갑시다. 퍼즐 맞추게.

우리 어머니가 날더러 제 털 빼 제 구녘에 박을 놈이라 하신 적이 있다. 오죽 했으면 당신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 그런 모진 소리를 하셨을까 싶다만 아무튼 퍼즐이란 게 바로 제 털을 제 구녘에 넣는 것인데 그 털이 다 그 털 같고 그 구멍이 다 그 구멍인지라 퍼즐을 맞추면서 나는 내가 천재가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퍼즐을 뒤집어 놓고 맞추는 자폐증에 걸린 천재는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레어 아이템인 것이다.

물질 세계는 퍼즐을 맞추지 않는다. 물질 세계는 퍼즐을 흐트러뜨리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어려운 말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다. 그까짓 퍼즐 하나 맞추는데 거 참 말 많다. 국가백년지대계를 운운하는 자리에 갔으면 말로써 세상을 아주 말아 드실 뻔했다. 이 사람아 퍼즐을 입으로 맞추나, 그만 닥치고 퍼즐이나 맞추세 그려. 그럼 그렇게 하세 그려. 드디어 나는 퍼즐 조각이라는 물질 세계에 내 정신 세계를 조금씩 주입하면서 하나하나 그림을 완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당신 같은 위버멘쉬적 존재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대개 와꾸부터 맞추는 방법을 택한다. 그게 나 같은 범인이 퍼즐을 맞추는 방법이다. 천재는 중심에서부터 맞춰나간다. 테두리부터 퍼즐을 맞추려면 생김새에 직선이 들어 있는 조각을 먼저 추려내 그림을 보면서 상하좌우에 배치하면 된다.

퍼즐을 맞추는 동안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기도 하고, 깍지를 껴서 팔을 머리 위로 쭈욱 뻗어 몸의 기럭지를 최대한 늘여보기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퍼즐을 다 맞추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내가 퍼즐이고 퍼즐이 나인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른다. 마침내 런너스 하이에 비견할 만한 퍼즐러스 하이에 도달하는 것이다.

다 맞춘 퍼즐은 미련없이 부수어 원래 상자에 담아 어디 깊숙한 곳에 쳐박아 둘 일이다.

인생 사용법

조르주 페렉(지음), 김호영(옮김), <<인생 사용법>>, 책세상, 2000

한번 뿐인 인생, 뭐하지? 딱히 할 일이 없네. 그럼 정말 뭐하지? 글쎄, 퍼즐이나 맞추지 뭐. 이리하여 바틀부스는 한평생 퍼즐이나 맞추기로 했다. 그냥 맞추면 심심하니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첫째, “1925년에서 1935년까지 10년 동안 바틀부스는 수채화 그리는 법을 배울 것이다.”

둘째, 1935년에서 1955년까지 20년 동안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구들을 주제로 15일마다 수채화 한 점씩”을 그릴 것이다. 그걸 퍼즐 만드는 전문 기술자에게 보내면 이 퍼즐 제작 전문가는 그 그림을 “얇은 나무판 위에 붙인 후 750조각의 퍼즐로 잘라낼 것이다.”

셋째, “1955년에서 1975년까지 20년동안 프랑스로 돌아온 바틀부스는 이렇게 만들어진 퍼즐들을 다시 15일에 한 개씩 정해진 순서에 따라 조립할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50년이 후딱 지나갔다. 인생 잘 썼다.

한편, 퍼즐제작 전문가 윙클레는 “손재주”가 대단하다. 그는 “총 500점의 해양화를 각각 750조각의 퍼즐로 제작하면서 각기 다른 공략, 다른 방법, 다른 시스템을 적용함으로써 바틀부스를 절망에 빠트린다.”(이건 뒷날개에 있는 글이다.) 존경스럽다. 나의 퍼소나로 삼고 싶다.

“외적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퍼즐은 혼자하는 놀이가 아니다. 퍼즐을 맞추는 이가 하는 각각의 행위는, 퍼즐을 제작한 이가 앞서 이미 했던 행위이다. 그가 몇 번이고 손에 쥐어보면서 검토하고 어루만지는 각각의 조각, 그각 시험하고 또 시험하는 각각의 결합, 각각의 모색, 각각의 직관, 각각의 희망, 각각의 절망은 타인에 의해 이미 결정되고 계산되고 연구되었던 것들이다.” 이것이 “퍼즐의 최후의 진리”이자 인생을 사용한 게임의 결론이다.

그러나 이 퍼즐게임은 9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많지 않다. 그밖에 무수한 등장 인물과 무수한 사건과 무수한 인용과 무수한 나열과 무수한 디테일로 가득차 있다. 특히 끊임없이 열거되는 물상物象들을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절로 졸리다. 조르주 페렉의 관찰력, 또는 기억력에 대한 경탄은 그 다음이다.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다.

역자 해설과 찾아보기를 포함하여 무려 919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다. 그러니 누가 읽겠는가.

p.s.
퍼즐, 이거 내가 와이프 다음으로 좋아하는 장르다. 따라서 나는 퍼즐 제작 및 풀이 과정에 대한 챕터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나도 사제 퍼즐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배포하고 술이나 삥뜯어 먹어야겠다. 어느 세월에. 아무튼 삥뜯기고 싶은 사람은 어여 줄서라. 오늘 밤에도 퍼즐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