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loser를 위한, 그제의 문장 비밀의 도서관

랄프 리자우 지음, 한미희 옮김, <<비밀의 도서관>>, 비룡소, 2006

“그[칼 콘라트 코레안더]는 지금까지 의미 있는 일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지금 그런 일을 할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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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포기하고 집어 던질까 하다가 인내심을 갖고 더 읽어 보기로 했다.)

칼이 저리 된 데는 아버지의 공이 크다.

“하지만 칼은 노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였다. 진짜 놀러간 적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계속해서 일을 다른 식으로 했다. 오늘은 포크들을 이 서랍에 넣었다가 내일은 저 서랍에 넣었다. 또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해 보았다. 부억 창문에 수채화를 그리기도 하고, 거실에 있는 가구의 위치를 바꾸어 놓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창의력이 있다고 칭찬하기는커녕, 벌컥 화를 내기 일쑤였다. 칼은 서서히 높은 담을 쌓고 자신의 그런 면은 마음속에 꼭꼭 감추게 되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책 뒤로 숨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도 꼴 보기 싫어했다.” pp. 1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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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이제 “구름 성의 왕”을 만나러갈 참이다. 그 왕은 이런 존재다.

“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 가벼운 것에 열광하는 남자가 있어요. 그는 묵직한 것은 뭐든지 싫어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돠 덧없는 것들을 수집한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그가 공백의 정체를 알지도 몰라요.” pp.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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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의 정체”는 무엇일까? 답을 얻으려면 독서를 계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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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길에 벤야민의 ‘아우라’를 연상시키는 구절을 만났다.

일행은 공기 요정의 키에 맞추어 설치된 낮은 받침대 위로 몸을 숙였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배로 큰 악어의 눈물이 주변의 모습을 단순히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한참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물에 ‘붙잡힌’ 상들은 잠시 후 스르르 다시 풀어졌다. 눈물이 주변의 모습을 비추고, 그 상이 잠깐 얼어붙은 듯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칼은 악어의 눈뭉레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감탄해서 바라보다가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바깥세상에도 이런 것이 있어요. 우리는 그걸 사진이라고 부르지요.”
그러자 왕이 깜짝 놀라서 나직하게 소리쳤다.
“순간을 붙잡을 수 있다고? 그 순간의 분위기도 다 같이 말이오?”
칼은 또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줄 알았소.”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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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의 문제”는 해결 되었고, 그 과정에서 신나는 모험이 있었다. 아내가 나우에게 사준 책을, 아이가 무슨 책을 읽는지 알고 싶다는 이유로 집어 들었다가 곤욕을 치렀다. “환상 세계’는 너무 환상적이라 적응하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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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이 책을 <<모모>>를 쓴 미하엘 엔데에게 헌정했다. 이 책은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이야기로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이야기하겠다”로 끝난다. 이 책에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식으로 할 수도 있다”는 문장이 너댓 번 나온다.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지음), 김욱동(옮김), <<앵무새 죽이기>>, 문예출판사, 2003(1판 10쇄)

나이 들어서 읽는 성장소설은 참 맹숭맹숭하다. 끝.

p.s.
이를테면, 네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낮술이라도 한 잔 걸쳤을지도 모르겠다.

<<앵무새 죽이기>>를 보면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는 구절이 나오지…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 저 말을 인용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앵무새 죽이기>>를 보면 “언젠가 아빠는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는 문장이 나오지…

그러나 사실은 이것도 부족하다. 이렇게 해야한다.

<<앵무새 죽이기>>를 보면 이런 말이 나와. 들어봐. “2학년은 썰렁했지만 오빠는 내가 상급반이 되면 학교 생활이 좀 나아질 거라고 했다. 오빠도 처음에는 그랬지만 6학년에 올라가서야 뭔가 가치 있는 것을 배운다고 했다. 오빠는 6학년이 되면서부터 마음에 들어했다. 짧게나마 이집트 시대를 배웠는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 오빠는 한 팔을 앞으로 내밀고 다른 한 팔은 뒤로 뻗치고 한 발을 다른 발 뒤에 놓은 채 몸을 낮추고 한 참을 걸어갔다. 오빠 말로는 이집트 사람들이 그렇게 걸었다는 거다. 그런 식으로 걸어다녔다면 그들이 어떻게 무슨 일인가를 했겠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오빠는 이집트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발명해냈다고 설명했다. 화장지도 발명해냈고, 영원히 썩지 않는 미라도 발명해 냈고 말이다. 그들이 그런 것들을 발명해내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물었다. 언젠가 아빠는 나에게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중에서 내가 인용하고 싶은 구절은 말이지 이 부분이야. 즉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는 부분 말이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니?

이를테면,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형용사를 빼버리는 일은 쓸쓸한 일이다. “그림자”만 남는다.

인생 사용법

조르주 페렉(지음), 김호영(옮김), <<인생 사용법>>, 책세상, 2000

한번 뿐인 인생, 뭐하지? 딱히 할 일이 없네. 그럼 정말 뭐하지? 글쎄, 퍼즐이나 맞추지 뭐. 이리하여 바틀부스는 한평생 퍼즐이나 맞추기로 했다. 그냥 맞추면 심심하니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첫째, “1925년에서 1935년까지 10년 동안 바틀부스는 수채화 그리는 법을 배울 것이다.”

둘째, 1935년에서 1955년까지 20년 동안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구들을 주제로 15일마다 수채화 한 점씩”을 그릴 것이다. 그걸 퍼즐 만드는 전문 기술자에게 보내면 이 퍼즐 제작 전문가는 그 그림을 “얇은 나무판 위에 붙인 후 750조각의 퍼즐로 잘라낼 것이다.”

셋째, “1955년에서 1975년까지 20년동안 프랑스로 돌아온 바틀부스는 이렇게 만들어진 퍼즐들을 다시 15일에 한 개씩 정해진 순서에 따라 조립할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50년이 후딱 지나갔다. 인생 잘 썼다.

한편, 퍼즐제작 전문가 윙클레는 “손재주”가 대단하다. 그는 “총 500점의 해양화를 각각 750조각의 퍼즐로 제작하면서 각기 다른 공략, 다른 방법, 다른 시스템을 적용함으로써 바틀부스를 절망에 빠트린다.”(이건 뒷날개에 있는 글이다.) 존경스럽다. 나의 퍼소나로 삼고 싶다.

“외적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퍼즐은 혼자하는 놀이가 아니다. 퍼즐을 맞추는 이가 하는 각각의 행위는, 퍼즐을 제작한 이가 앞서 이미 했던 행위이다. 그가 몇 번이고 손에 쥐어보면서 검토하고 어루만지는 각각의 조각, 그각 시험하고 또 시험하는 각각의 결합, 각각의 모색, 각각의 직관, 각각의 희망, 각각의 절망은 타인에 의해 이미 결정되고 계산되고 연구되었던 것들이다.” 이것이 “퍼즐의 최후의 진리”이자 인생을 사용한 게임의 결론이다.

그러나 이 퍼즐게임은 9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많지 않다. 그밖에 무수한 등장 인물과 무수한 사건과 무수한 인용과 무수한 나열과 무수한 디테일로 가득차 있다. 특히 끊임없이 열거되는 물상物象들을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절로 졸리다. 조르주 페렉의 관찰력, 또는 기억력에 대한 경탄은 그 다음이다.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다.

역자 해설과 찾아보기를 포함하여 무려 919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다. 그러니 누가 읽겠는가.

p.s.
퍼즐, 이거 내가 와이프 다음으로 좋아하는 장르다. 따라서 나는 퍼즐 제작 및 풀이 과정에 대한 챕터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나도 사제 퍼즐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배포하고 술이나 삥뜯어 먹어야겠다. 어느 세월에. 아무튼 삥뜯기고 싶은 사람은 어여 줄서라. 오늘 밤에도 퍼즐이 바람에 스치운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지음), 박현주(옮김),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마음산책, 2005

스밀라는 눈 위에서 “가속도가 일어난 자국”을 알아볼 만큼 감각이 뛰어나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술술 읊어댈 정도로 지적이며 차가운 겨울 바닷물 속에서 200M를 헤엄쳐 살아날 만큼 강인하다. 사물과 사태에 대한 냉정하고 과학적인 분석력과 판단력, 인간에 대한 애정,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동류의식, 주류에 대한 체질적인 반감 등 많은 매력을 지녔다.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닳고달은 베테랑 수사관 뺨칠 정도다. 말로도 그렇고 행동으로도 그렇다. 막판에 배를 타고 벌이는 그녀의 신출귀몰, 좌충우돌한 행동은 가히 원더우먼 친동생 수준은 된다. 아, 그리고 그녀는 말만하면 수표를 끊어주는 부자 아빠를 두었다. 스밀라는 인간이 아니다. 거의 수 천 년만에 재림한 초인Ubermensh이다. 사랑스럽다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그렇지만 나는 인간을 사랑할 시간도 별로 없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구절은 이렇다. “스밀라가 죽으면 내가 스밀라 가죽을 가져도 돼?”

교양

디트리히 슈바니츠(지음), 인성기 외(옮김), <<사람이 알아야할 모든 것, 교양>>, 들녘, 2001(초판 1쇄), 2002(초판 30쇄)

내가 읽은 판본이 초판 30쇄이니 제법 많이 팔렸다. 엄청 두껍다. 부제가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인데 태반은 모르는 것이니 나는 사람도 아닌가, 라는 생각을 3초간 했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거의 읽지 않았고 2부는 다 읽었다. 그 중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의미를 언어 형태로부터 걸러낼 수 있는 사람만이 의미에 다른 형태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다는 건가?
그것은 일상의 의사소통이 우리에게 이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교사가 자신의 교실로 막 들어가려는 데 교실에서 “으악”하는 고함소리가 들린다고 치자. 그가 문을 와락 열어 젖히자 바보 같은 학생 몇 명이 모여서 이를 허옇게 드러내며 씨익 웃고 있다. 교사가 묻는다. “무슨 일이야?” 이제 이 질문에 대해 서로 다르게 대답하는 두 학생, 에밀과 알베르트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에밀이 말한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여기 이 알베르트가 저한테 ‘암퇘지 같이 겁 많은 놈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구 똥구멍 같이 더러운 놈아! 한 번만 더 말해봐. 네 주둥이를 묵사발로 만들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한테 ‘너는 겁이 많아서 아마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도 못지를 거야. 어디 한 번 내기해 볼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좋아, 진 사람이 이긴 사람 무등태워 주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여기 있는 카를 하인츠 한테 ‘봐라. 지금 에밀이 꽁지를 슬슬 빼고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내가 꽁지를 뺀다고’라고 말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저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반면에 알베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고 치자.
“우리는 에밀이 정말로 있는 힘을 다해 크게 소리를 지를지, 아니면 안 지를지에 대해서 한심한 내기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두 학생 중에서 누가 더 똑똑한 학생일가?

나는 내 아이를 시험에 들게 했다.
“아빠가 지금부터 어떤 이야기를 할 텐데 그걸 간단하게 요약해봐. 알았지?”
“응.”
“아빠는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자다가 일어나서 점심을 먹고 다시 자다가 일어나서 저녁을 먹고 책을 보다가 다시 잤어. 그리고 일어나 보니까 아침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