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雪國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2004(7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로 시작한다. 내 인생에 저 터널을 지나가는 날이 오게 되면, 그런 날이 오겠느냐만, 그때 기억해 보리라.

놀고먹는 한량, 애딸린 유부남 시마무라가 눈 많이 오는 니카타 현의 온천장에서 고마코라는 꽃다운 게이샤와 연애하는 이야기. 허무한 아름다움.

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송병선(옮김), <<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2004(13쇄)

짧게 쓴다. 재밌다.

그러므로 이하 사족.

몰리나: 동성애자, 여성성 강함,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 징역 8년, 즉 잡범, 영화광, 야부리 선수, 즉 이빨꾼, 같은 깜빵에 있는 발렌틴에게 영화 얘기를 해주고, 즉 썰을 풀고 나쁘게 말해서 그를 따먹음. 좋게 말해서 그를 사랑함. 사랑하게 됨, 그래서 나중에 게릴라의 총에 맞아 죽게 됨. 슬픔.

발렌틴: 혁명가, 즉 정치범, 판결대기중, 허구헌 날 몰리나에게 영화 얘기 해달라고 조름, 몰리나가 교도소장에게 구해온 맛있는 거 염치없이 얻어만 먹음, 몰리나가 교도소장에게 맛있는 거 얻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가 몰리나를 이용해 발렌틴의 조직을 때려잡으려고 공작을 펼치는 와중이었기 때문임. 국가는 발렌틴의 음식에 설사제를 쳐넣기도 했음. 국가가 공작을 위해서 몰리나를 가석방하게 되자 몰리나에게 자기 조직에게 연락을 취해줄 것을 요청하여 결과적으로 몰리나를 죽음에 이르게 함. 몰리나가 죽고 난 뒤 전기고문을 당함. 간호사가 놓아준 몰핀, 즉 뽕을 맞고 애인 마르타를 꿈 속에서 만남. 슬픔.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몰리나와 발렌틴의 대화임. 그 중 하나.

발렌틴: “그녀(마르타)는 날 몹시도 그리워했다는 뜻인데, 우리는 서로 깊은 애정을 느끼지 않기로 약속했어.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행동을 해야 할 순간에 서로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거든”
몰리나: “행동한다는 것은 도대체 뭐지?”
발렌틴: “행동한다는 것, 그건 목숨을 건다는 거야”
몰리나: “그렇구나……”
발렌틴: “누군가가 우릴 사랑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절대로 할 수가 없어. 그건 우리가 살기를 원하는 것인데, 그러면 죽는 것을 두려워하게 돼. 아니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죽게 되면 고통 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이 괴롭다는 건데……”

나는 이런 이유로 헤어진 커플을 알고 있다. 80년대에.

아주 지긋지긋하다.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세계 사진사 32장면

최봉림 지음, <<세계 사진사 32장면>>, 디자인하우스, 2004(1판 2쇄)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역사에 도통 관심이 없었다. 남의 탓 먼저 하자면 어린 시절의 교육 때문이었을 것이다. 곰이 마늘 먹고 인간이 되었다는 둥,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다는 둥,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산다는 둥, 소도는 죄짓고 도망가 숨기 좋은 곳이라는 둥 도통 이상한 소리만 해대니 역사란 참 현실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로구나, 했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 국사를 배우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 때 외운 지식들은 말 그대로 단편적인 것이어서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는 빈 도시락 속에서 젓가락 달그락거리듯 시끄럽게 달그락거릴 뿐 체계적인 거 하고는 영 거리가 멀다. 선죽교에서 충신 정몽주가 악의 무리에 의해 철퇴를 맞고 테러를 당해 죽었는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고, 무악대사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들었다는 식이다. 내가 미친다.

가장 참담한 건 아직도 술에 취하거나 하면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이라는 척화비를 외운다거나 성삼문 박팽년 말고 사육신이 또 누가 있더라, 하는 따위로 술주정을 하게 되는 경우다.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다.

남의 탓은 이정도로 하고 내 탓을 하자면 다 내가 못난 탓이다. 그래도 국사는 제도 교육을 받는 동안 지겹도록 들어서 대충 까막눈은 면했다 쳐도 세계사는 특히 쥐약이다. 세계사는 재수하면서 학원에서 들은 게 전부다. 지금 기억나는 건 딱 하나나. 세계 3대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다른 건 모른다.) 요즘은 일본, 미국, 유럽 등의 역사책을 읽어볼까 생각중이다. 어느 세월에 그러겠냐만.

무슨 까닭인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한국사 이야기 100장면, 세계사 이야기 100장면, 이런 류의 책 지금까지 딱 한 권도 읽어 본적이 없다. 아마도 이런 책은 정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세계 사진사 32장면 이 책도 우연히 읽게 된 것이다.

이 책을 펼치면, 중앙선(짝수쪽의 오른쪽과 홀수쪽의 왼쪽이 만나는 선)부근에 1년을 눈금하나로 나타내는 방식으로 하여 1820년부터 1960년까지 눈금이 그어져 있다. 보기 쉽게 하기 위하여 매 10년 마다는 긴 눈금을 그었고, 그 사이의 5년에 해당하는 눈금은 중간길이이다. 쉽게 ’30센티미터 자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32장의 사진이 제작된 해에는 굵은 선으로 표시했다. 폰트로 치면 볼드체다. 이 방법은 각 장에서 제시된 사진이 사진의 역사에서 어디쯤에 있는 건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혹은 그 사진이 사진의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진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는 지 모르겠다. 아니면 편집자의 꿈보다 독자의 해몽이 좋은 건지도 모르고.

프랑스 사람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1765-1833)가 1816년에 “오목 렌즈가 달린 약 16cm의 정방형 암상자로 자기 방 창문 앞에 있는 가금장을 촬영”하여 ‘최초의 사진’을 만들었다하니 인류역사에 사진이 등장한지는 이제 190년이 조금 못되었다. 그 기간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찍은 그 많은 사진들 중에서 딱 32장만 골랐으니 그야 말로 ‘영재 중의 영재’들만 선발된 셈이다. 그 선발 기준을 평가할 만한 식견이 나에게는 없으므로 제대로된 선발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보먼트 뉴홀의 <<사진의 역사>>와 비교하며 읽었다. 저자도 뉴홀의 책을 자주 언급하거나 인용한다. 더불어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도 옆에 두면 좋다. 역사라는 게 하루밤에 읽어서 알게 되는 게 아니니 몇 번은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여담으로 내 인생의 32장면을 뽑아봐야겠다. 처음으로 외롭다고 생각한 날, 처음으로 몽정한 날, 처음으로 대가리 박은 날, 결혼한 날, 내 자식 태어난 날, 술먹고 처음 필름 끊긴 날, 뭐 찾아보면 많겠지.

달리, 나는 세상의 배꼽

김종근 지음, <<달리, 나는 세상의 배꼽>>, 평단아트, 2004

뭉크의 <절규>가 도난당했다, 한다. 내가 훔치기로 결심했던 그림인데 한발 늦었다. 아깝다. 아깝긴 하지만 세상에는 훔칠만한 가치가 있는 그림이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그중의 하나가 <기억의 영속성>이다. 달리의 것이다. 나른한 그림이다. 시계가 오뉴월 쇠불알 맹키로, 아, 아니다, 고운 말 써야지, 시계가 오뉴월 엿가락 맹키로 축! 늘어져 있는 그림이다. 뭔가 황량하고, 뭔가 쓸쓸하다.

달리. 다섯 살 때는 세발자전거 탄 아이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린 다음 피범벅이 된 아이를 보고 좋아라, 하고 열여섯에는 돌계단에서 몸을 날려 지 몸을 피멍들게 해놓고 좋아라, 하고 지 그림의 전시회에 잠수복으로 완전군장?을 한 채 개 두 마리를 끌고 나타나 사람들을 벙찌게 만들어 놓고 좋아라, 하고 남의 아내 빼앗아 데리고 살며 좋아라, 하고 요상한 콧수염을 달고 좋아라, 하던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화가란다. 미친 건지, 뻔뻔한 건지, 예술적인 건지, 천재적인 건지……

그러나 달리의 그림은 솔직히 불편하다. 어떤 건 역겹고 어떤 건 무섭다. 내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 거실용이라면 차라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풍의 <이발소 그림>을 한 장 쌔벼 오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롯데 마트 에스컬레이터 옆에 잔뜩 걸려 있다. 나는 천상 좀도둑 수준인 것이다.

The_Persistence_of_Memory_1931.jpg
─ 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 oil on canvas –
– 24 x 33 cm –
–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03(1쇄), 2004(2쇄)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더 많은 음악,
하고 목소리는 말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이름은 없다. 그냥 M이다. 이름이 M이라고 깔보면 안된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의 이름은 이름 석자 다 드러나도 나에게는 무의미한 “임의적 기호”에 지나지 않지만, 나와 관계가 있는 어떤 사람의 이름은 영문 이니셜 하나에도 내 전 존재를 떨게 하는 힘이 있으니까. 그러면 M은 누구인가? M이 ‘더 많은 음악’이라고 말한 목소리이다. M은 “언어학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음악에 미쳐있는 영혼”이었으며 나의 독일어 개인교습교사였다. 그러나 M의 독일어 교습방법은 “이제 간신히 독일어 ABCD 문법 교본을 반 정도만 마스터했을 뿐인 나에게”는 너무 어렵다. 이런 식이다. 내가 한 페이지 정도를 소리 내서 읽고나면 M이 그 중에서 하나의 단어나 문장을 골라 설명을 한다. 장황하게. 길게.

“황량하다, 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있어? 모른다고? 그것은 말이야, 눈에 보이는 특별한 것이 없다,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무책임하고 형식적인 설명일 뿐이야. 눈에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황량할 수도 있어. 좀 다른 거야. 예를 들자면 마치 사막처럼 모두 같은 색으로 보인다든지, 건물은 많으나 살아 있는 것은 전갈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든지, 모두 떠나가 버렸다든지, 어디에도 우물이 없다든지, 기차역이 너무 멀다든지 말이지. 지루하다거나 무미건조하다는 것과는 좀 다르게 생각될 수 있어. 그런데 그는 왜 황량하다, 라고 했을까. 삭막하다, 라거나 공허하다, 라는 단어 대신에 말이지. 그 단어들을 모두 넣어서 아무 문장이나 만들어 얘기해주겠어? 그리고 풍경을 묘사하는 다른 단어들 중에 생각나는 다른 것이 있으면 아무거나 예를 들고 그것과 비교하면서 설명해줄 수 있겠어?”

이상적인 교습법이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다. 그러니 독일어 공부의 진도가 제대로 나갈 리가 없다. 연애면 또 몰라도. 해서 나는 M에게서 독일어는 그만 배우고 대신에 M과 사랑을 한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쉽지가 않다. 나는 사정상 한국에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M에게 세 달 있다가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할 수는 있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둘은 갈등 끝에 헤어진다. 아프다.

새삼스럽게 묻는다. 사랑은 대체 무엇인가? 예전에 나는 ‘사랑은 커뮤니케이션이다.’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 이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배수아는 언어를 사용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이때의 언어의 문제는 사용하는 언어가 모국어냐 외국어냐의 문제는 아니다. M이 ‘나’에게 가르쳐주고자 했던 언어, 즉 ‘보편적’인 언어의 문제이다. 이때 보편적 언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고 정신이며” “인종적인 차이나 개체간의 선천적인 차이보다도 더욱 보편적”인 언어를 의미한다.

언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음악”으로. 그러나 역시 한계는 있다. 그 한계는 무엇으로 극복한단 말인가. 어려운 문제다. 아무려나 당신은 쇼스타코비치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그러니 나는 이 소설 혹은 에세이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사랑은 다 끝났는데 그래도 나는 책상에서 쓴다. 이 책상이 이 소설의 제목인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다. “내가 M에게 무엇인가 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내 책상은 그것이 어디에 있는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가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그대로 옮긴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게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배수아. 이상한 작가다. 묘한 매력이 있는데 그렇다고 깊게 빠져들게 되지도 않는다. 끝으로 인상 깊은 구절 하나: “쓰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일단 쓰기 시작하는 거야. 무척 간단하잖아.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