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50년

50년 전 엄마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만 있었다. 누나는 울면서 학교에 갔다. 나는 어쩔 줄 몰랐고 그래서 어쩌지 않았다.

50년 후 아버지와 형이 차례로 죽고 엄마는 울다가 말이 없어 졌다. 누나는 엄마를 돌보고 나는 어쩔 줄 모르겠다.

보조개

보조개가 없으면 없는 것 평생 없는 것 이번 생에는 없는 것 없는 보조개를 어디 가서 구한단 말인가 없다고 죽을 것인가 콱 죽어버릴 것인가 고작 보조개 겨우 보조개 없어서 갖고 싶어서 쓸쓸해서 구질구질해서 찬란한 보조개 나의 없는 보조개

오래된 갈등

뭘 해도 안 되는 날들이다. 읽어도 읽히지 않고 써도 씌이지 않으며 잠들어도 잠들지 않고 의식해도 의식되지 않는다. 신경이 온통, 정신이 몽땅, 존재가 통째로 그곳으로 가 있다. 나는 내 삶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나는 내 존재를 부분적으로 긍정한다. 어느 것도 나는 아니며 모든 것이 나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지만 누구라도 만나고 싶다. 먹어도 먹지 않고 자도 자지 않는다. 그곳에 가자. 있으나 없는 곳. 이 생에 나는 너를 제법 만났으나 결코 너를 만난 적이 없다. 죽어도 좋으나 살고 싶었다. 오래된 갈등이다.

낡은 뇌

아내가 부엌 창밖을 보며 날씨가 흐리네, 라고 말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풀이 눕겠네,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아직도 김수영이면 어쩌자는 건가.

2023년 11월 어느 날의 일기

“문 밖에 오아시스가 와 있대.”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말했다.
나는 아내의 말이 뭔가 시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주문만 하면 다음날 아침에 문 밖에

오아시스가 득달같이 당도하는 사하라의 세계.

오아시스.

새로운 말을 만들 게 아니라 있는 말을 재활용하는 게 브랜드 네이밍이다. 카카오가 그렇고 멜론이 그렇고 당근이 그렇고 오아시스가 그렇다, 는 생각을 덧붙여 하는데 아내가 묻는다.

“김치찌개라도 끓여드려요?”

내가 반문한다.

“고기가 있어요?”

아내가 대답한다.

“돼지고기 샀지. 오아시스에서. 찌개용.”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는 지하에 대한 묘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