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엄마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만 있었다. 누나는 울면서 학교에 갔다. 나는 어쩔 줄 몰랐고 그래서 어쩌지 않았다.
50년 후 아버지와 형이 차례로 죽고 엄마는 울다가 말이 없어 졌다. 누나는 엄마를 돌보고 나는 어쩔 줄 모르겠다.
50년 전 엄마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만 있었다. 누나는 울면서 학교에 갔다. 나는 어쩔 줄 몰랐고 그래서 어쩌지 않았다.
50년 후 아버지와 형이 차례로 죽고 엄마는 울다가 말이 없어 졌다. 누나는 엄마를 돌보고 나는 어쩔 줄 모르겠다.
보조개가 없으면 없는 것 평생 없는 것 이번 생에는 없는 것 없는 보조개를 어디 가서 구한단 말인가 없다고 죽을 것인가 콱 죽어버릴 것인가 고작 보조개 겨우 보조개 없어서 갖고 싶어서 쓸쓸해서 구질구질해서 찬란한 보조개 나의 없는 보조개
뭘 해도 안 되는 날들이다. 읽어도 읽히지 않고 써도 씌이지 않으며 잠들어도 잠들지 않고 의식해도 의식되지 않는다. 신경이 온통, 정신이 몽땅, 존재가 통째로 그곳으로 가 있다. 나는 내 삶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나는 내 존재를 부분적으로 긍정한다. 어느 것도 나는 아니며 모든 것이 나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지만 누구라도 만나고 싶다. 먹어도 먹지 않고 자도 자지 않는다. 그곳에 가자. 있으나 없는 곳. 이 생에 나는 너를 제법 만났으나 결코 너를 만난 적이 없다. 죽어도 좋으나 살고 싶었다. 오래된 갈등이다.
아내가 부엌 창밖을 보며 날씨가 흐리네, 라고 말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풀이 눕겠네,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아직도 김수영이면 어쩌자는 건가.
“문 밖에 오아시스가 와 있대.”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말했다.
나는 아내의 말이 뭔가 시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주문만 하면 다음날 아침에 문 밖에
오아시스가 득달같이 당도하는 사하라의 세계.
오아시스.
새로운 말을 만들 게 아니라 있는 말을 재활용하는 게 브랜드 네이밍이다. 카카오가 그렇고 멜론이 그렇고 당근이 그렇고 오아시스가 그렇다, 는 생각을 덧붙여 하는데 아내가 묻는다.
“김치찌개라도 끓여드려요?”
내가 반문한다.
“고기가 있어요?”
아내가 대답한다.
“돼지고기 샀지. 오아시스에서. 찌개용.”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는 지하에 대한 묘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