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부엌 창밖을 보며 날씨가 흐리네, 라고 말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풀이 눕겠네,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아직도 김수영이면 어쩌자는 건가.
아내가 부엌 창밖을 보며 날씨가 흐리네, 라고 말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풀이 눕겠네,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아직도 김수영이면 어쩌자는 건가.
“문 밖에 오아시스가 와 있대.”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말했다.
나는 아내의 말이 뭔가 시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주문만 하면 다음날 아침에 문 밖에
오아시스가 득달같이 당도하는 사하라의 세계.
오아시스.
새로운 말을 만들 게 아니라 있는 말을 재활용하는 게 브랜드 네이밍이다. 카카오가 그렇고 멜론이 그렇고 당근이 그렇고 오아시스가 그렇다, 는 생각을 덧붙여 하는데 아내가 묻는다.
“김치찌개라도 끓여드려요?”
내가 반문한다.
“고기가 있어요?”
아내가 대답한다.
“돼지고기 샀지. 오아시스에서. 찌개용.”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는 지하에 대한 묘사가 없다.
아이패드를 식탁 한 쪽에 거치해 두고 저녁을 먹는다. 아내는 어디 갔고, 딸은 나가 살고, 원-아들은 알바 갔고, 투-아들은 군대 갔다. (쓰다 보니 원-아들은 퍼스트-아들, 투-아들은 세컨드-아들로 써야한다 싶지만 그게 뭐 대수냐 싶다.) 혼자 가는 먼 길, 인생이니 혼자 가는 먹는 저녁이 뭐 대수냐 싶다.
저녁을 먹다보니 반주라도 한잔 하고 싶은데 무슨 놈의 집구석에 소주 한 병이 없다. 원-아들이 얼마 전 일본 다녀오며 사다 준 위스키가 저기 있지만 생-냉동-해동-삼겹살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 그냥 먹는다.
아이패드에서는 이상한 영화를 하고 있다. 심각한 주제를 코믹하게 보여준다. 웃기는데 웃기지 않는다. 딴 거 볼까 하다가 그냥 본다. 봐도 그만 못봐도 그만이니 흐름을 놓칠 염려도 없고 시작했으니 끝까지 봐야한다는 생각도 없다.
문득 아이패드 화면에 내 얼굴이 보인다. 젊은 날의 에센스라든가 에스프리라든가 하는 거는 다 휘발하고 없는, 빈 얼굴이다. 역시 소주가 있어야 했다.
책 읽다가 존다. 졸다 아예 눕는다. 읽던 책으로 얼굴을 덮어 빛을 차단한다. 세상 아늑하다. 까라지는 것도 같다. 내 잠든 머리 속에 단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굿간에서 시작해 외양간, 방아간, 똥뚜깐, 푸줏간까지 온다. 헛간과 곳간과 절간과 뒷간도 오는 걸 애써 물리친다. 짐칸, 기차칸, 침대칸, 식당칸 따위가 다음 차례다. 간이나 칸이나 깐으로 끝나는 단어들을 무의미하게 나열하다가 맞춤법을 교정하기도 전에 돌연 우주가 쫑난다. 하, 이게 아닌데…
넓은 책상을 좁게 쓰는 방법은 책상에 온갖 걸 다 늘어놓고 쓰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쓰고 있다.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책상에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
어찌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책상 위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싹 다 치우면 된다. 문제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아, 있기는 있다. 바나나 껍질.
그러나 어림 한 티스푼 없는 소리다. 바나나 껍질 하나 치운다고 이 넓으나 비좁은, 그러니까 내 고매하고 더티한 인품 같은, 이 내 책상에 삼공 노트 누일 자리가 생기겠는가!
나는 어쩔 수 없는 세마이-호더(semi-hoarder)인 것이다. 책상을 책상으로 쓰지 아니하고 창고로 쓰고 있기 때문에 내가 대문호가 못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 영혼의 책상은 늘 비좁았으며, 그 비좁은 책상에 이것, 저것, 그것이 다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평생을 이거 하다가 저거 하고 저거 하다가 그거 하고 그거 하다가 디스 하고 디스 하다가 댓 하고 댓 하다가 썸싱하고 썸싱하다가 결과적으로 나씽하며 살았다.
사람도 그러해서 평생 노원을 만났다. 발치에 와 발라당 눕고 눕는 고양이 ‘모모’만 남았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