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안 되는 날들이다. 읽어도 읽히지 않고 써도 씌이지 않으며 잠들어도 잠들지 않고 의식해도 의식되지 않는다. 신경이 온통, 정신이 몽땅, 존재가 통째로 그곳으로 가 있다. 나는 내 삶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나는 내 존재를 부분적으로 긍정한다. 어느 것도 나는 아니며 모든 것이 나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지만 누구라도 만나고 싶다. 먹어도 먹지 않고 자도 자지 않는다. 그곳에 가자. 있으나 없는 곳. 이 생에 나는 너를 제법 만났으나 결코 너를 만난 적이 없다. 죽어도 좋으나 살고 싶었다. 오래된 갈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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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뇌
아내가 부엌 창밖을 보며 날씨가 흐리네, 라고 말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풀이 눕겠네,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아직도 김수영이면 어쩌자는 건가.
2023년 11월 어느 날의 일기
“문 밖에 오아시스가 와 있대.”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말했다.
나는 아내의 말이 뭔가 시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주문만 하면 다음날 아침에 문 밖에
오아시스가 득달같이 당도하는 사하라의 세계.
오아시스.
새로운 말을 만들 게 아니라 있는 말을 재활용하는 게 브랜드 네이밍이다. 카카오가 그렇고 멜론이 그렇고 당근이 그렇고 오아시스가 그렇다, 는 생각을 덧붙여 하는데 아내가 묻는다.
“김치찌개라도 끓여드려요?”
내가 반문한다.
“고기가 있어요?”
아내가 대답한다.
“돼지고기 샀지. 오아시스에서. 찌개용.”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는 지하에 대한 묘사가 없다.
2023 가을 자화상
아이패드를 식탁 한 쪽에 거치해 두고 저녁을 먹는다. 아내는 어디 갔고, 딸은 나가 살고, 원-아들은 알바 갔고, 투-아들은 군대 갔다. (쓰다 보니 원-아들은 퍼스트-아들, 투-아들은 세컨드-아들로 써야한다 싶지만 그게 뭐 대수냐 싶다.) 혼자 가는 먼 길, 인생이니 혼자 가는 먹는 저녁이 뭐 대수냐 싶다.
저녁을 먹다보니 반주라도 한잔 하고 싶은데 무슨 놈의 집구석에 소주 한 병이 없다. 원-아들이 얼마 전 일본 다녀오며 사다 준 위스키가 저기 있지만 생-냉동-해동-삼겹살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 그냥 먹는다.
아이패드에서는 이상한 영화를 하고 있다. 심각한 주제를 코믹하게 보여준다. 웃기는데 웃기지 않는다. 딴 거 볼까 하다가 그냥 본다. 봐도 그만 못봐도 그만이니 흐름을 놓칠 염려도 없고 시작했으니 끝까지 봐야한다는 생각도 없다.
문득 아이패드 화면에 내 얼굴이 보인다. 젊은 날의 에센스라든가 에스프리라든가 하는 거는 다 휘발하고 없는, 빈 얼굴이다. 역시 소주가 있어야 했다.
소파에 지다
책 읽다가 존다. 졸다 아예 눕는다. 읽던 책으로 얼굴을 덮어 빛을 차단한다. 세상 아늑하다. 까라지는 것도 같다. 내 잠든 머리 속에 단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굿간에서 시작해 외양간, 방아간, 똥뚜깐, 푸줏간까지 온다. 헛간과 곳간과 절간과 뒷간도 오는 걸 애써 물리친다. 짐칸, 기차칸, 침대칸, 식당칸 따위가 다음 차례다. 간이나 칸이나 깐으로 끝나는 단어들을 무의미하게 나열하다가 맞춤법을 교정하기도 전에 돌연 우주가 쫑난다. 하, 이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