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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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부재하는 동안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케어합니다. 큰 아이 ‘우’는 컴퓨터를 합니다. 야후! 꾸러기 > 전래동화 > 떡보 만세를 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나라 사신이 떡보에게 “네가 삼강을 아느냐?”하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이자, 마침 사신을 만나러 가기 전에 떡을 다섯 개나 먹은 우리의 용사 떡보는 ‘내가 떡 다섯 개 먹었다. 어쩔래?’ 하는 의미로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보입니다. 멍청한 당나라 사신은 ‘아, 저 놈이 삼강은 물론이고 오륜도 안다는 구나. 거 똑똑한 놈이로세.’하고 이해합니다. 네, 떡보는 저 방법으로 나라를 구합니다.

둘째 아이 ‘엽’은 ‘어깨 너머’ 전문 선수입니다. 아니 꼽지만 꾹 참고 제 누나가 야후! 꾸러기 하는 걸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아 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했는지 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 합니다. 제목은 ‘동물의 생활’입니다. 이 책 좀 웃깁니다. 첫 페이지부터 대뜸 한다는 소리가 ‘모든 동물이 살아가는 목적은 새끼를 낳기 위해서예요.’입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목적을 알려준 책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며, 새끼를 더 낳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엽’이는 우리의 용사 떡보가 당나라 사신을 무찌르는 모니터를 보랴, ‘동물의 생활’ 들으랴 바쁩니다. 곧 ‘모니터’가 우세승을 거둡니다. 나는 동물의 성생활 읽기를 슬그머니 멈추고 내 책을 읽습니다. ‘엽’이는 잠시 후 다시 ‘아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하더니 가서 다른 책을 가져옵니다. 이번에는 ‘물고기의 생활’입니다. 도대체 왜 동물도 생활을 하고 물고기도 생활을 하는 걸까요?

셋째 ‘언’이는 다행히 젖병하나 꿰차고 잠들었습니다. 이 상태로 한 시간 정도 지납니다.

마침내 ‘우’가 주무시겠답니다. ‘거, 불감청이지만 고소원이로세.’ 나는 속으로 뛸뜻이 기뻐하며, 그러나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은 채 ‘우’를 재우러 들어갑니다. 그동안 ‘엽’이는 레고를 하거나 공룡을 그리거나 할 겁니다.

하여, 막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내가 돌아옵니다. 아내가 돌아오는 소리에 아이들은 어느 시인이 좋아하는 표현으로 ‘자동화사격장의 표적지’처럼 벌떡 일어나 뛰어나갑니다. 네, 엄마 맞습니다. 엄마가 왔습니다.

엄마를 본 ‘우’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됐어. 아빠. 이제 아빠는 가도 돼.”

나무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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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 안에 켜켜이 결을 쌓아 온 나무가
꼭 뭐가 되려고, 굳이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를테면 출세 같은 걸 하려고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혹은, 나무가
감히 하늘 끝까지 닿아보겠다고
제가 무슨 바벨탑이라도 되는 양 끝끝내
하늘을, 딱 한 번만 하늘을
더듬어보겠다고
저 보이지도 않는 발버둥을 치며
허구헌 날 땅을 쪽쪽 빨아 먹은 것도 아닐 것이다.

나무는 그저
제가 나무였으므로
나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므로
평생을 나무 노릇이나 하며 살았을 것이다.

마분지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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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왜 공룡 따위를 좋아할까? 내 보기엔 그놈이 다 그놈 같은데, 아이는 ‘트리케라톱스’니 ‘벨로키랍토르’니 ‘티라노사우르스(내가 아는 유일한 공룡이름)’니 하는 이름의 공룡들을 만들어 방바닥에 잔뜩 널어놓고는 사진을 찍어달란다.

어쩌면 덜거덕거리는 마분지 애니메이션을 만드시는 ILA님이 어려서 이딴 거 하고 놀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 당신! 이 따위넷에 얼쩡거리시지 말고 바로 지금 “낮은데서 바라보기 ─ 6mm로 본 사람과 세상”에 가서 찬찬히 ILA님의 작품들을 감상해 보시라. 당신 가슴에 6mm의 금이 가는 걸 느끼게 될 거다. 아, 글쎄. 얼른 뛰어가라니깐!

이제부터는 혼자서 살아갑니다.

애벌레가 알에서 천천히 빠져 나옵니다.
바늘 같은 입도 작은 낫 같은 앞다리도 제대로 생겼습니다.
아빠물자라의 등 위에서 듬뿍 공기를 마시고 흰 몸을 폅니다.
저것 보세요. 넓적한 모양의 애벌레입니다.
아빠물자라가 물 속으로 살짝들어가 애벌레를 물에 띄웁니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살아갑니다.

─ 자연의 신비 20, <물자라>, 교원

밤입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줍니다. 나름대로 목소리 연기까지 합니다. 아이는 듣는 둥 마는 둥합니다. 그렇다고 읽기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읽기를 멈추면 아이는 ‘땡깡’을 부립니다. 아마도 책읽는 소리를 무슨 사운드 이펙트나 제 놀이의 배경음악 쯤으로 여기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여어여 읽어 마지막 페이지에 닿아야 책 읽어주기의 괴로움에서 ‘해방’이 됩니다. 그래서 계속 읽습니다. 잠시 딴 생각을 했나봅니다. 눈이 텍스트를 쫓아가고 입이 한음절 한음절 텍스트를 발음하지만 나는 내가 소리내어 읽는 문장을 듣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불성실한 아빠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문장을 만납니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살아갑니다’라는 문장입니다. 나는 잠시 아득해집니다. 나는 도리질을 치며 서둘러 책읽어주기를 마칩니다. 제 난데 없는 도리질에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왜 그래?” “응, 아냐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