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지음), 이윤기(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Zorba the Greek>>, 열린책들, 2004

유명한 책이라는 데 난 여태 뭐하고 살았는지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안소니 퀸 주연으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다. 줄거리를 요약하지는 않으련다.

조르바는 ‘나’를 ‘두목’이라고 부른다. 조르바가 보기에 ‘나’는 “쓰레기 같은 책만 잔뜩 집어넣어 놓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다. 한마디로 책상물림이란 뜻이다. 이 책은 그런‘내’가 기록한 조르바의 어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조르바가 주둥이 열어 하는 말마다 어쩜 그렇게 쿨한지…… 쿨한 말 몇 개만 옮긴다. 전후 맥락을 잘라내고 적는 것이니 뜻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조르바 씨, 이야기는 끝났어요. 나와 같이 갑시다. 마침 크레타엔 내 갈탄광이 있어요. 당신은 인부들을 감독하면 될 겁니다. 밤이면 모래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 먹고 마십시다. 내겐 계집도 새끼도 강아지도 없어요. 그러다가 심드렁해지면 당신은 산투리도 치고…….”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리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리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제임베키코(소아시아 해안지방에 거주하는 제임백 족의 춤), 하사피코(백정의 춤), 펜토잘리(크레타 戰士의 춤)도 출 수 있소.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내’가 보는 조르바의 모습은 이렇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빛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 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이해한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 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이요! 그래, 뜨였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비참해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조르바, 말에 거침이 없다. 그 거침없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때 그는 춤을 춘다. 그것도 아주 결사적으로 춘다. “그의 늙은 육신이 그 난폭한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공중에서 수천조각으로 찢어져 바람에 사방으로 날릴 것만 같아 두려”울 지경으로 춘다. 이쯤 되면 발악이다.

그가 이따금 이렇게 격렬하게 춤을 추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다. “나라는 놈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어요. 내 속에는 소리치는 악마가 한 마리 있어서 나는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면 이놈이 소리칩니다. <춤춰!> 그러면 나는 춤을 춥니다. 그러면 숨통이 좀 뚫리지요.[……]하지만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정말 미치고 말았을 겁니다. [……] 두목, 이제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지요? 젠장, 아니라면 내가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건가?

조르바에게 춤이란 말로써 말할 수 없을 때 몸으로 말하는 행위인 셈이다. 하긴 누구나 그런 때가 있는 법이다. 미친 듯이, 미친 듯이 흔들어대고 싶을 때가. 어디 광란의 춤판 벌어진데 없나?

이런 ‘인간’의 삶에 여자가 빠지면 섭섭하다. 그의 연애관:
여자는 맑은 샘물과 같습니다. 거기 들여다 보면 모습이 비칩니다. 마시면 되는 겁니다. 뼈마디가 녹신녹신할 때까지 마시면 됩니다. 이윽고 목이 마른, 다음 사람이 옵니다. 그 사람도 자기 모습을 들여자 보며 마시면 되는 겁니다. 세 번째 사내가 오겠지요……”

이 ‘인간’ 지가 결혼 몇 번 했었는지도 모른다. “몇 번 했느냐고요? 정직하게 말하면 한 번 …… 한 번이면 되는 거 아니오? 반쯤만 정직하게 말하면 두 번…… 비양심적으로 치자면 천 번, 2천 번, 3천 번쯤 될 거요. 몇 번 했는지 그걸 다 어떻게 계산합니까?” “수탉이 장부를 가지고 다니며 한답니까?” 그야말로 허걱. 이다.

“두목, 당신은 젊어요. 당신은 아직 젊어서 몰라요. 나처럼 머리꼭지가 허옇게 세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합시다. 이 영원한 사업 문제를.”
“무엇이 영원한 사업인가요?”
“그야 물론 여자지요!
여자가 영원한 사업이란 이야기는 대체 몇 번이나 해야 합니까? 현재의 당신은 양 꼬리가 두 번 까딱거릴 시간에 암탉을 찍어 누르고는 가슴을 턱 펴고 똥 더미 위에 올라가 뻐기며 한바탕 우는 수탉과 다름없어요. 암탉은 보지 않아요. 볏만 봅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걸 알 턱이 없지. 악마나 물어갈 일이지!”

다음은 내가 가장 통쾌하게 여겼던 말: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엘리아의 제야

고종석(지음), <<엘리아의 제야>>, 문학과지성사, 2003

잘라 말한다. 얘기꾼으로서의 고종석은 실망스럽다. 이 소설집은 지은이의 ‘자기 목소리’의 동어반복이다. 그 ‘목소리’는 내가 <감염된 언어>나 <서얼단상>이나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등에서 들었던 목소리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의 전작 <기자들>이나 <제망매>를 읽어보지 않아 이 판단은 섣부를 수 있다. 문제는 그의 전작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는 것.

말미에 김병익의 해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는 마침내, 인문주의자에서 소설가로서의 운명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 문장은 좀 민망하다. 뭐, 어차피 덕담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