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황

그는 고집스럽게 고집을 피우며 고집을 부렸다, 는 식의 되도 않는 문장들만, 그것도 어쩌다가, 머리를 떠돈다. 우울하다.

핸드폰은 살아 있다.

예전에 부동산 중개소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난 뒤에 온갖 이사짐 업체로부터 여러 통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싸게해 줄테니 부디 자기네 업체를 이용해 달라고 말했다. 그런 전화가 세 번쯤 걸려오자 나는 부동산 중개소에 전화를 걸어 내 전화번호를 ‘그들’에게 알려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중개소는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 뗐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다.

중개소가 잡아 떼고 난 다음에도 나는 여러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약이 바싹 오른 나는 다소 어리숙하던 어느 일진 사나운 업체의 직원을 ‘협박’하여 아무개 담당 실장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아무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로부터 그가 담당 구역을 돌며 중개소로에서 잠재 고객들의 전화번호를 수집한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는 내 이름과 이사 날짜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업소에 약간의 사례를 한다고도 말했다.

나중에 부동산 중개 수수료를 지불하러 부동산 중개소에 들렸을 때 나는 다시 내 전화번호를 알려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중개사는 여전히 부인했다. 돌아나오는 내 뒷통수에 느껴지는 그의 시선이 따가왔다. 아마도 유난을 떤다고 욕깨나 했을 것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그 중개소 앞을 지나며 ‘저주’를 퍼붓는다. 망해라. 삼대가 망해라.

뜬금없이 예전 기억을 주절주절 늘어 놓는 이유는 이렇다. 요즘 나는 어쩌다 팔자에 드문 대리운전 한 번 하고 온 죄값으로 이틀이 멀다하고 대리운전 광고 문자 메시지를 받고 있다. 나는 딱 한 군데에 전화를 걸었을 뿐인데 그날 이후 온갖 대리운전 업체에서 문자가 날아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그들’이 내 전화번호를 공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요일에 성업이 되는 지 오늘은 5통을 받았다.

그밖에 슬슬 시즌이 다가오는 지라 각종 연말 모임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와 ‘은희’라는 이름의 사진을 보러오라는 문자 메시지(연결하시겠습니까?) 등 온갖 잡 문자 메시지가 날아온다. 어느 모임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리고 행사 일주일 전부터는 거의 하루에 한 두차례씩 문자를 보낸다. 참석하려고 했다가도 그 문자만 보면 마음이 아주 싹 가신다. 됐거든!

핸드폰은 살아 있으나, 그 핸드폰 주인은 죽을 맛이다.

초겨울 바람 심하게 부는 날 버즘나무 이파리들의 집단기도를 빙자하여 장난스레 표현해 보는 오늘 내 으스스했던 기분

“질식한 후 재로 뒤덮인 희생자들의 몸에 의해 생긴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음으로써 고고학자들은 폼페이 최후의 날의 비극을 강렬하게 재현했다.”(미쉘 피에르, <<열정의 이탈리아>>, 효형출판, 2001)

바람을 가로 막은 죄를
이 흔들림으로 사하여 주옵시고
제게도 작은 “빈 공간”을 허락하시어
누군가 “재현”할 혹은 개무시할 이 존재의 떨림을
제가 앞으로 부재할 공간 속에 영원히 판박아 짱박아 주소서.
날이 추워 오뎅을 다 판
우리 오뎅장수의 이름으로
건성건성 기도하옵나이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1.
일요일, 온 가족이 빈둥댔는데 드디어는 마음이 또 근질근질 해진 우가 산에 가자고 졸랐다. 날도 쌀쌀한데다 귀찮기도 해서 이 핑계를 대서 결국 우의 마음을 돌렸다. 한 숨 자고 났는데 아직도 마음이 근질근질한 우가 이번에는 공원에라도 가자고 졸랐다. 이번에는 저 핑계를 대서 역시 가지 않았다. 녀석은 결국 다 포기하고 저 혼자 나가서 줄넘기를 하고 들어오더니 얼마 후 그림 반 글 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깨 너머로 보니 이렇게 썼다. “밖에 나가서 줄넘기를 했다. 재미 있었다.” 순간 이번에는 내 마음이 마구 간지러워졌다. 산에 다녀왔으면 틀림없이 이렇게 썼으리라. “아빠와 산에 갔었다. 재미 있었다.”

2.
언이가 프라하의 연인을 보다가 TV 모니터에 가까이 가더니 전도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 마디 했다. “아빠, 얘 정말 예쁘다.” 나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가 기어코 아이를 시험에 들게 했다 . “어니야, 엄마보다 더 이쁘든?” 아이는 엄마 눈치를 살짝 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자식 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말하며 분개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짜식, 눈은 높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