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앞에서 2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돌아와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목말라 목말라 목이 말라 깨어난 무서운 새벽 안경 찾기도 귀찮아 안경도 안 쓰고 화장실 불 켜기도 귀찮아 불도 안 켜고 대충 변기를 겨냥하여 일을 본다 무슨 소리가 난다 이 소리도 일종의 존재와 존재가 충돌하는 소리다 후련하다 후련하다 나는 후련하다고 아주 후련하다고 아주 속 시원하다고 생각한다 젠장 이 간단한 조준도 더러 빗나간다 원래 조준은 빗나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조준이 빗나갈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니 더러 빗나가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아침에 아내에게 틀키지 않도록 샤워기를 틀어 화장실 바닥에 물을 뿌린다 물을 뿌리며 나는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는 인간도 있을까 하는 실 없는 생각이나 한다 잠자리에 누워 문득 처방전 없이 신경안정제를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나는 잠들지 못한다 생각에서 두고 두고 지린내가 난다

기엽이의 일기

일요일 아침, 배가 고팠다. 그래서 엄마한테 가서 말했다.

“엄마, 배고파.”

 엄마가 말했다.

“아빠한테 가서 말하렴.”

그래서 아빠한테 가서 말했다.

“아빠, 배고파.”

아빠가 말했다.

“엄마한테 가서 얘기해 보렴.”

그래서 다시 엄마한테 가서 말했다.

“엄마, 아빠가 엄마한테 가서 말해 보래.”

엄마가 말했다.

“아빠한테 가서 빵 사다 달라 그래.”

그래서 다시 아빠한테 가서 말했다.

“아빠, 빵 사다줘.”

아빠가 빵을 사다 주셨다.

할 수 없이, 마지 못해, 있는 대로 궁시렁거리며 사다 주셨다는 말도 덧붙여야 겠다.

빵을 먹으니까 배가 불렀다. 

그나저나 보자보자 하니까 울 엄마 아빠는 내가 탁구공인줄 아시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도 탁구공이 바람에 스치운다.

p.s. 

점심 때다. 울 아빠는 지금 라면을 끓이고 있다. 오늘 점심에도 라면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