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에 대처하는 아들의 자세

초등학교에 입학 한 지 한 달, ‘우리들은 일학년’을 떼고 4월 들어 읽기, 쓰기, 즐생, 바생, 슬생을 줄줄이 배우기 시작한 아들 녀석은 그 첫 주가 지나기도 전에 두 번이나 교과서를 제대로 챙겨가지 않아 담임 선생에게 전화가 오게 만들었다.

아니, 집에서 애 교과서도 안 챙겨주고 대체 뭐하자는 거예욧!
그러게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러나 어쩐 일인지 나는 녀석의 그런 띨띨함이 좋다. 지 어미의 전언에 의하면 교과서를 가져다 주러 가서 보니 녀석이 코를 훌쩍이며 울고 있더란다. 참으로 아쉽고도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테면 큐대 좋고, 다이 좋고, 자세 좋고, 각도 좋고, 회전 좋고, 그리하여 거의 예술구 수준으로 쓰리 쿠션을 돌렸는데 아뿔싸 막판에 그만 쫑이 나버린 거다. 학생이 어쩌다 교과서 따위는 잊고 올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듯,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당당하고 뻔뻔하게 굴었더라면 더 바랄 게 없는데 말이다.

야, 이 녀석아. 훌쩍 거리고 있는 너를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네가 있다고 생각해봐. 울고 있는 너가 멋있게 보이겠냐 아니면 씩 웃는 네가 더 멋있게 보이겠냐, 자고로 여자애들 앞에서 훌쩍거리면 인기가 급락한단다, 하면서 앞으로 그럴 땐 씩 웃으라고 말해주는데, 그러면 선생님한테 더 혼난다고 반성의 빛을 띠고 있어야 하는 거라고 지 누나와 지 어미가 극구 반대하고 나선다.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어린이라고 칭찬만 받고 무럭무럭 자라난 게 나는 못내 억울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안 빠지고 그 빌어먹을 학교에 가서 월남에서 베트공들을 무찌르고 계신 백마부대 국군장병 아저씨들을 자랑스러워하라고 배운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민방위의 노래를 합창하고, 떠들었다고 칠판에 이름 한 번 적힌 적이 없는 나는, 여자애들 고무줄 한 번 끊어본 적이 없는 나는, 무릎 꿇고 앉아 걸레에 왁스를 묻혀 교실 바닥에 광을 내면서 구멍 난 양말 때문에 영 스타일 구겼던 나는, 그런 내 국민학교 시절이 못내 억울하여 아들을 통해서 보상받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로 문제 아빠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니 선생님한테 야단 맞고 집으로 휙 가버린 여자애가 았었다. 안경 쓰고 피아노 잘 치던. 아, 저럴 수도 있구나. 저래도 되는 거구나. 그러나 끝끝내 일탈 한번 하지 못했던 내 꽃다운, 빌어먹을 소년시절이여!

저 위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나봐

커트 보네것(지음), 노종혁(옮김), <<저 위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나봐>>, 새와 물고기, 1994

웃자고 보면 웃기는 책이다. 좋게 말해서 재기발랄한 유머─이런 유머를 블랙 유머라고 하는 모양이다─가 있고 나쁘게 말해서 황당무계하다. 농담의 백미는 이렇다.

“지구시간으로 기원전 203,117년, 세일로는 기계상의 문제로 태양계에 착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주선 동력장치에 있는 지구의 깡통따개 크기 정도의 작은 부속품이 완전히 망가지는 바람에 착륙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세일로는 타이탄에 임시로 숙소를 정하고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트랄화마도르에 알렸다. 그는 빛의 속도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는 트랄화마도르에 도착하는 데 지구시간으로 150,000년이 소요될 것이었다.”

“회신은 현재 영국에 있는 한 평야에 커다란 돌로 씌어 있었다. 이 회신의 잔재는 아직도 서 있고, 스톤헤인지라고 알려져 있다. 위에서 본 스톤헤인지의 의미는, 트랄화마도르 언어로는 이러했다 : ‘교체부품이 가능한 한 최고의 속도로 가고 있음.’
세일로가 받은 메시지가 스톤헤인지뿐인 것은 아니었다.
지구에 씌여진 것은 모두 네 개였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위에서 보면 트랄화마도르 언어로 이러햇다 : ‘조금 참을 것, 자네를 잊지 않고 있음.'”

잘라 말해서, 지구의 역사란 어느 행성에서 특별 임무를 주어 우주 반대편으로 파견했던 사일로(라는 기계)에게 고장난 우주선 수리에 쓸 쇠조각 하나를 전달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거다. 그 임무란 알고 보니 안녕하슈?, 하고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지금 장난하냐? 소리가 절로 난다. 허무하고 허무하고 허무하다. 문제의 쇠조각을 그냥 또 하나의 우주선에 실어 보내면 됐지 구태여 뭐하러 이런저런 복잡한 일을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무려나 나 알 바 아니다.

요즘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하나씩 꺼내 읽고 있는데, 이 책도 그 일환이다. 알라딘을 검색해보니 이 책은 <<타이탄의 미녀>>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가 다시 절판되었다. 원제는 The Sirens of Titian이다. 이 책을 뭐 소장씩이나 하게 된 에피소드와 소회도 있다만 떠벌일 만한 일은 아니다.

자작나무는 죄가 없다.

아파트 단지가 조경 공사 문제로 시끄럽다. 단지 외곽의 자작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잣나무를 심자는 것이다.

자작나무가 키가 커서 다른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며, 미관상 좋지도 않고, 가을에 낙엽이 지면 치우기도 힘들다는 것이 공사를 하자는 사람들 입장이다. 입주자대표와 각동 동대표들이 공사를 하기로 결정했고, 그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70%가 넘는 주민들이 찬성을 했다고 한다. 이미 외부업체 선정까지 끝나 내일 4일(수요일) 아침 8시부터 나무를 자른다고 한다.

공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오늘 “불법” 모임을 가졌다. 가서 들어보니 반대파의 주장은 첫째,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절차에 하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아이들만 있는 집에 와서 찬성표를 받아간 경우도 있고,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은 채 조경 공사를 하려고 하는데 찬성하느냐고 물어 조경공사하면 좋겠지 뭐, 라는 단순한 생각에 찬성표를 던진 경우도 있다. 둘째, 경비 문제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장기수선충당금인가 뭔가를 유용하고 나중에 부녀회 기금으로 보전한다고 하는데 부녀회에는 그만한 돈이 없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내용이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과정에서 충분히 고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기라는 것이다.

수 십 여명이 모여 한 마디씩 하느라 의견이 분분했으나 일단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서명을 받고, 내일 아침에는 공사를 강행하지 못하도록 “실력 저지”에 나서자는 결의를 했다. 법원에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을 내야한다는 데도 의견이 모아졌다. 입주자대표는 일부 주민들이 실력 저지에 나설 경우에는 업무집행방해로 고발까지 불사하겠다고 했단다.

사태의 추이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 문제를 계기로 입주자대표회의를 해산하자는 등 봄의 아파트 단지가 소란스러울 것이다. 어쨌거나 이 참에 나도 소위 업무집행방해라는 걸 좀 해볼 생각이다. 일이 재밌어졌다. 자작나무는 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