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 찬가

어제밤에는 잘 잤다 자다 깨서 어둠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도 않았고 만신창이가 된 한 세계와 그 세계의 주인이 나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지도 않았다 어제밤에는 잘 잤다 자다 깨서 가래를 뱉지도 않았고 물 마시러 부엌을 뻔질나게 드나들지도 않았고 비만의 육신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비명을 삼키지도 않았다 어제밤에는 잘 잤다 거의 자리에 눕자마자 잠들었다가 일어나보니 아침이었다 어제밤은 내 인생의 비교적 괜찮은 밤의 목록에 넣어도 좋았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 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열한 살 아들녀석이 튕겨대는 단조로운 기타 소리에 잠이 깬 아침 나는 내가 어제밤에 비교적 편안하게 잤다는 걸 깨닫고 저으기 흡족해 하였다 다만 한 가지 내 소중한 대가리가 시궁창 속에 곱게 쳐박혀 있었다는 것만 빼면 어제밤은 정말이지 괜찮은 숙면의 의아한 밤이었다

노는 것들을 용서하자

띵땅띵땅 띵땅띵. 12시 5분, 핸드폰이 운다. 딸아이 전화다.
아빠, 난데. 나 지금 학교 끝났는데 2시 반까지만 놀다가도 되지?
그래라. 그런데 점심은 어떡할래?
응, 학교에서 실과 시간에 뭐 만들어 먹어서 안 먹어도 돼.
알았다.
띡띡띡띡. 조금 있으니 아들녀석이 현관자물쇠를 해제하는 신호음이 들린다.
왔어요.
왔냐?
아빠, 근데 나 나가서 좀 놀다와도 되지?
그래라. 점심은?
괜찮아. 배 안 고파.
그래도 뭐 좀 먹어야지.
그러면 좋고.
부엌에서 뭐 먹일 거 없나 뒤지는데, 따르릉, 이번에는 집전화가 울린다. 아들녀석이 받는다.
컬렉트 콜인데 계속 통화하려면 버튼을 누르라는데?
얼른 눌러.
막내일 것이다. 나는 손에든 누룽지를 녀석에게 건네고 수화기를 받아든다.
여보세요?
아빠, 나 언인데. 세훈이네서 좀 놀다가도 되지?
그래라.
다녀올게요.
아들녀석이 나가면서 인사한다.
그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