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NOIR

극중인물 중에 감정이입을 시켜볼 대상이라고는 그나마 신하균이 연기한 음악 선생 밖에 없는데, 이 양반, 하시는 액션과 비해이비어마다 꼬질꼬질하고 지지리도 못나서, 저분 대관절 왜 저러시나, 여자가 그만 만나자면 어차피 불륜으로 만난 사이인데 하루이틀 괴로워 한 다음에 훌훌 털고 일어나 어디 가서 다른, 곱고 외로운 유부녀 꼬시면 되지, 세상 실연은 저 혼자 다 당한 것처럼 참 못나게도 구네, 하는 생각은 들어도, 저분 정말 괴로우시겠다, 콱 죽어버리고 싶으시겠다, 는 식으로 공감이 간다거나, 아니면 이 양반이 지가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의 뒤통수를 망치를 갈기지 못하고 망설이는 순간에, 야 이 새끼야, 그냥 확 내리치란 말이야, 하면서 어떤 ‘치달음’을 지지해 줄 수도 없는데다가, 신하균하고 바람 핀 유부녀나, 신하균만 해바라기하는 동료 선생이나, 신하균한테 제 사정 다 털어놓고 소설가를 기다리는 이상한 언행의 처자나, 혹은 신하균의 동선과 이상하게 겹치는, 이별통보 전문 메신저인 택배 소녀나 하나 같이 난감한 여자 사람들인지라 나로서는 전혀 애정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 시간 넘도록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디 마음 둘 곳이 없었음이다.

자연, 저건 영화야, 나는 지금 저녁 먹고 홀로 영화관에 와서 정성일이 만든 영화를 보고 있는 중이야, 내가 미쳤지, 나도 저 남산 케이블카를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언제였더라, 저쪽이 용산이고 저기가 나 어릴 적 살던 동네구나, 괴물의 주무대는 저기보다 하류 아니었나, 저 광장시장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녹두전 잘 하는 집이 있지, 막걸리 하고 곁들여 먹으면 좋은데, 음, 명동성당이군, 성모님도 안녕하시군, 아니 연신내 간다면서 사직터널 지나서 무학재 쪽으로 우회전 해야지 왜 직진하는 거야, 연대앞으로 해서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 쪽으로 돌아가려나, 아니면 ‘그림’이 이 길이 더 좋았나, 하는 식으로 내 의식이 스크린 밖으로 자꾸 튕겨져 나왔음이다. 그냥 영화는 영화고 나는 나였는데, 그래도 영화는 묘하게 매력적이었음이다.

죽일 놈의 사랑은 짧고, 무슨 동원 양반김도 아니고 살짝 살짝 두 번 차인 사내의 덧없는 인생도 짧았지만, 롱테이크는 정말 길었다. 죽지 마라, 죽지 마라. 젊은 베르테르는 죽었지만, 괴테는 살아남아 관직에도 오르고 그랬다.

짜파게티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
제 어미를 따라 마트에 다녀온 막내가 시장 바구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여준다. 짜파게티다.
녀석의 얼굴에는 뭔가를 이뤄냈다는 성취감이 가득하다.
아빠, 이거 내가 엄마 따라가서 사온거야, 내일 맛있게 끓여먹자, 아빠도 좀 줄게, 하는 거 같다.
퍼뜩 정신이 든다. 살아서 짜파게티 많이 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