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오늘도 슬프다 이외의 다른 언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슬프다, 라고만 쓴다. 내일 일기도 미리 써둔다. 슬프다. 앞의 문장은 마음에 든다. 없고 없을 내 무덤의 묘비명으로 써야겠다

bless you

추석이다. 처가에서 저녁 먹는다. 식탁에서 아들이 기침을 한다. 처형이 블레스 유, 한다. 아내도 블레스 유, 한다. 나는 블레스 유, 하지 않고 이런 말을 떠올린다. 엄니, 나 불렀시유? 그러나 발설하지는 않는다. 저녁 다 먹고 화장실 간다. 화장실에서는 이런 말이 떠오른다. 저 집에 불났시유? 명절적으로 명절이 간다. 아내 처녀적에 쓰던 방 책꽂이에서 낡을 대로 낡은 삼중당 문고 한 권을 슬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