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난감이다

영화 <토이스토리1>:
자신이 지구방위사령부 소속 우주전사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우리의 버즈는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고 자신이 고작 장난감에 불과한 장난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을 까마귀라고 알고 있었던 까마귀가 알고 보니 백조였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이럴 수가! 차마 믿을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어서 버즈는 날개를 펴고 날아보기로 한다. 그는 2층 앤디의 방문 앞에서 저 앞에 보이는 창문을 향해 날개를 펴고 두 팔을 쭉 뻗어 주문을 외치며 날아오른다. 이렇게!
지상을 넘어 영원으로! To Infinite and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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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저기 <화면>에 보이는 조그만 창문 밖 파란 하늘로 날개 달린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그 새의 흔적이 아직 저기 남아 있다. 버즈가 우주전사라면 지상을 박차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방금 전에 날아간 새처럼 저 푸른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고, 보잘 것 없는 장난감에 불과하다면 중력의 명을 받고 추락할 것이다. 결과는 예상대로 슬프다.






다.

그렇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추락하는 국보법도 날개가 있다.) 관객인 우리는 그의 몸짓이 사실은 무모한 투신에 불과 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세상에는 당사자만 모르는, 나머지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진실이 있는 법이다. 객기 한 번 부린 대가로 그는 한쪽 팔이 뚝 떨어져 나가는 전치36주의 중상을 입는다. 자신이 장난감이라는 걸 알았으면 그냥 장난감으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걸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 인간이나 장난감이나 마찬가지다. 예정된 수순대로 그는 절망한다. 절망한 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또 예정된 수순대로 한동안 자포자기의 삶을 산다. 만화영화가 늘 그러하듯이 그는 또 예정된 수순대로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한다.

나는 장난감이다.

그러니 세상이여, 날 가지고 마음껏 장난쳐다오.

개미의 행방불명

2003년 9월 30일 오전 4시 25분에서 8시 57분 사이에 문제의 개미는 평소처럼 방안을 여기저기 헤매고 있었다 침대 발치쯤에 이르렀을 때 개미는 어제까지 없던 가방을 발견하게 되고 뭐 먹을 게 있나, 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개미가 미처 답사를 끝마치기 전에 아내가 구워준 토스트를 먹고 아내가 타준 모닝커피를 마시며 이승엽이 한 시즌 최다 홈런기록을 달성하지 못한 채 “또 하루가 갔다”는 신문을 읽고 베란다에서 유치원 가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옷을 입고 아, 가을인가 얼굴이 땅기네, 스킨을 발라야겠다, 하며 스킨을 바르고 난 다음 나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왔다 버스정류장에서 ‘은행나무 아직 노랗게 물들지 않았음’하고 누군가에게 상상으로 전보를 치고 버스를 탔고 자리에 앉았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몇 정류장 쯤 지났을까 나는 문득 가방에 묻어 있는 문제의 개미를 보았다 나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톡 쳤, 아차, 싶었지만 개미는 툭하고 떨어졌다 개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읽던 책을 계속해서 읽었고 버스는 계속해서 달렸다 한편 버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개미는 여기가 어디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개미는 졸지에 넓은 세상으로 나왔으나 졸지에 갈 곳이 없어졌다 한편, 개미의 집에서는 아무도 개미의 부재를 알지 못했다

p.s. 찾아보니 작년에 이런 것도 썼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