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하나에 고독
둘에 외로움
하며 너는 걸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날들이 있었다

가끔은 하나에 슬픔
둘에 농담
하며 걷기도 했다

갈대들은
하나에 의미
둘에 역사
하며 흔들렸다

너는 사건과 파문에 대해
그럴사한 의견이 없었다

동남쪽 하늘에는 토성이
서쪽 하늘에는 목성과 금성이
빛나고 있었다

하나에 정치
둘에 포르노
하며 너는 걸었다

하나에 피아이
둘에 엔케이
하며 너는 걸었다

너는 슬픔을 본격적으로 기뻐하게 되었다

—2015년 6월

스텔라

카시오페이아를 봤다. 지난 봄까지는 밤하늘의 왠만한 별의 이름은 대충 알았는데, 이제 가을에 접어들면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 가득 찬’ 별들의 이름은 아는 게 거의 없다. 별 공부를 게을리한 탓이다. 산책을 나와 밤하늘을 보는 건 좋다. 자주 그렇게 하도록 하자.  

  

아마도 그건 토요일 아침이었을 거야

토요일 아침, 라면 먹는다. 일종의 해장이다. 아내가 라면 덜어먹을 그릇 챙겨주며 설거지 좀 하라고 말한다. 나는 아내에게는 관심이 많지만 설거지 따위, 청소 따위, 빨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토닥거린다. 어제 23시 20분 꺼 예매해 달래서 영화 보고온 딸은 잔다. 아들 둘은 내가 끓인 라면 먹는다.

그러다 내가 그 잘 부르는 노래로,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고야, 를 흥얼거린다. 아내가 그게 무슨 노래드라, 하다가 아마도 그건, 이라고 말한다. 아내가 가수가 누구더라, 궁금해 한다. 나는 유투브를 검색해 아마도 그건, 을 듣는다. 박보영의 목소리로 듣는다.

듣고 나니 조승우, 손예진 나오는 영화에 사용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유투브 목록에 보인다. 누른다. 영화의 한 장면이 시작된다. 나는 재생을 멈춘다. 조승우가 눈먼 사람 연기하는 장면은 보고 싶지 않다. 손예진은 예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다.

이제, 목록에 에일리가 부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보인다. 재생버튼 누른다. 끝까지 본다. 듣는다. 그러다가 문득 너무 아픈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음을, 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라면 먹다가 스마트폰으로 이거 쓴다. 라면 다 불었다.

에일리의, 며칠 전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를 듣고 싶지만 제목도, 가사도 생각나는 게 없다. 그만 쓰고 라디오 듣다가 가사를 메모해둔 걸 열어 가사를 검색해 노래 제목을 알아내서 에일리의 노래를 듣기로 한다.

p.s.

하여 검색해 보았더니, 그 노래는 에일리의 노래가 아니었다. 노래 제목은 말해주지 않겠다.

***

윗집 안방에서 부부싸움하는 소리

크게 들린다.

아침

앞으로 도로에서 다른 차가 내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만드는 운전을 하면, 아 새끼 또… 호수같은 내 마음에 물수제비 뜨네, 하고 말겠다. 저 대사는 만화가 김보통의 D.P 개의 날, 에서 본 것이다.

아, 오늘은 또 어떤 자식이 내 마음에 물수제비 뜨려나. 어저께 너 소나타 운 좋은 줄 알어.

아침 대신 먹으려고 단호박을 쪘는데, 이건 뭐, 당췌 뭐, 단호박이 아니라 맹물호박이네.
너 이놈의 호박 새끼, 이 여름에 광합성한 당분 다 어디다 꼬불쳤어. 응. 엉.

언어가 덥다

김애란의 소설에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 라는 문장이 반복 되는 게 있다. 제목은 잊었다. 편의점 어쩌구 했던 것도 같고 아닐 지도 모른다.

가끔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 라는 문장을 흉내 낸다. 표절이다. 방금도 그랬다. 아내가 세탁기 안의 빨래가 다 내 꺼라고, 날더러 널라고 그러고 외출을 하고 난 뒤, 빨래를 널다보니 오우 마이 갓, 내 것이 아닌 빨래가 섞여 있는 거다.

아니 내 빨래 아닌 게 있는데 왜 다 내 꺼라 그런 거야, 아 내 빨래가 대부분이라는 뜻이었구나. 아내가 처음부터 그런 뜻으로 말한 걸 내 몰랐던가. 그럴리가. 나는 언어가 괴로운 사람이다. 나는 언어가 덜 자란 사람이다. 나는 피곤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