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일 III

아이폰으로 흥미롭게 듣고 있던 어떤 녹음 파일의 재생이 중단되는 순간, 나는 안다, 곧, 아내 표현에 의하면, 귀곡산장 같은 느낌적 느낌의 내 전화벨이 울리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소위 이른바 날도 화창한 ‘불금’인데 이따 저녁 때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친구의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오리라는 것을. 그런데 아니었다. 오늘도 친구 놈들은 다들 스크린골프나 치러 갈 것이다. 무엇을 상상하던 나는 그 이하를 듣게 될 것이다. 전화를 건 여자는 곧바로 원고를 읽기 시작한다. 대충 이렇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IBK 기업은행의 협력회사인 아무개 캐피탈인데요, 이번에 고객님들을 위해서 저렴한 금리로 대출해 드리는 상품을 안내해 드리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천 만원까지는 간단한 상담 후에 바로 대출을 해드립니다. 혹시 필요하신 자금이 있으세요?”

내가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은가? 안 그래도 은행에 돌아온 어음을 막느라 자금이 급하게 필요하던 차인데 마침 전화 잘 하셨다. 기왕 빌려주는 김에 10억원만 빌려주시라, 했을 것 같은가? 아니면 지금 담배값마저 떨어져 콱 죽어버릴까 생각중이었는데 사람 살리는 셈치고 2,700원만 입금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을 것 같은가? 그러면 귀찮은 스팸 전화야 금방 끊나겠지만 이 어찌 착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입만 열면 착한 일을 하는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유산을 많이 받아서요.” 내 대답을 들은 텔레마케터는 웃었다. 그 웃음이 씁쓸한 것 같기도 하고 기가 막혀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러고보니 이것은 착한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착한 일 II

오늘도 난 또 착한 일을 했다. 일전에는 도서관에서 착한 일을 했는데 이번에는 병원에서 간호사들을 빵 터지게 만들어 주었다. 그들이 나를 보며 저런 환자만 있으면 간호사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이번에도 내 궁예적 눈에 빤히 보였다.

암센터 19호 휠체어에 앉아 있던 중년 여자는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은 색 후드티를 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그녀의 아들은 병색이 완연한 엄마 옆에서 아이폰에 코를 처박고 카카오톡을 하고 있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여자는 아들이 자신의 상태에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서운했고 아들은 자신이 놓인 괴로운 상황이 마냥 괴로웠다. 착하게 사는 건 어렵다.

얼마 전 산에서 만난 노인은 갑상선 제거 수술을 받고 나면 호르몬제를 복용하더라도 15년 밖에 못산다고 말했다. 전망대에 앉아 산 아래 가을 풍광을 감상하고 있던, 역시 그날 산에서 처음 만난 여자는 그 얘기를 듣고 기분이 언짢아졌다. 5년 전에 갑상선 제거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만간에 병원에 갈 일이 있으니 의사에게 물어봐주겠다고 그 여자에게 약속 아닌 약속을 했고, 오늘이 그날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10호 진료실을 나오기 전에 나는 의사에게 그 노인의 말이 과연 믿을만 한 것인지 물었고 의사는 정색을 하면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나의 워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갑상선을 제거하고 호르몬제를 장기복용하면 효과가 떨어지나요?” “그렇죠? 아니죠? 제가 얼마 전에 산에서 도사 할아버지를 만났는데요, 그 할아버지가 그러시더라구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문제의 간호사들은 도사라는 단어에서 빵 터졌다. 착한 일 하기 되게 쉽다.

조만간에 산에 가서 그 여자를 만나 도사 할아버지 말 다 뻥이라고,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라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모르고 얼굴 마저 기억하지 못하니, 수명이 10년 밖에 남지않았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실의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여자를 다시 만날 일이 딴에는 난감하기는 퍽이나 난감하다.

스크린 골프

명절적으로 또 명절을 보내고 엊그제 오랜 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은 스크린 골프를 치고 나는 그들의 게임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골프존’이라는 이름의 골프 시뮬레이션 솔루션은 매타마다 쇠몽둥이를 휘두를 선수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 알려주었다. “김프로님 스윙할 차례입니다.” “이프로님 퍼팅할 차례입니다.” 김프로, 이프로는 게임 시작 전에 직원이 입력해준 호칭이었다. 골프업계에서는 프로가 의전 호칭인 모양이었다. 나는 개새끼라고 입력하면 저 기계가 개새끼님 스윙하실 차례입니다, 라고 알려주느냐고 당연한 걸 물었다. 이어서 따위님 퍼팅하실 차례입니다, 따위님 뻐킹하실 차례입니다, 따위의 연상이 이어졌으나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오비를 낸 친구 하나가 더럽게 안 맞는다며 투덜거릴 때 시의적절한 문자를 받았다. 며칠 뒤 예정돼 있는 모임에서 스크린을 하기로 했는데 참석 가능하냐고 묻는 메시지였다. 그렇다면 다음 기회에 보자고 답신을 보냈다. 그렇다면 다음 주에 다른 종목의 모임을 마련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때 보자고 답신을 보냈다.

두번째 게임 18홀, 나는 임프로의 마지막 퍼팅을 대신 쳐보는 영광을 얻었다. 그건 누구라도 한번에 넣을 수 있는 공이었고, 그래서 나도 한번에 넣었지만 최종결과는, 내 환상적인 버디적 퍼팅에도 불구하고, 트리플 보기였다. 이후 닭갈비를 먹었고 당구를 쳤고 문어를 먹었고 장소를 옮겨 새우구이를 먹었다. 골프채 얘기와 자식 얘기와 늙어 병드신 이쪽저쪽 부모님들 얘기와 원청에 하청에 돈 떼인 얘기와 다른 친구들 얘기 등을 나누었다. 나도 여간해서는 안 하던 얘기를 털어놨다. 대리기사가 모는, 갈 때도 얻어타고 갔던 친구의 차를 얻어타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와서 딸이 자기 방에 잠들어 있는지 확인했고 처용처럼 안방문을 열고 아내 외에 아들들 그림자 두 개가 더 있는지 확인했다.

다음 날에는 의정부에 갈 일이 있어 의정부에 다녀왔다. 가는 길에 부대찌개 좋아하는 아들 녀석들에게 원조 부대찌개 맛을 보여주려고 아이들을 달고 다녀왔다. 그러나 막상 의정부에 가서는 어느 집이 진짜 순 오리지날 원조 부대찌개집인지 알 길이 없어 그냥 주차하기 편한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진짜 순 오리지날 원조 부대찌개를 먹었다. 몸 상태는 하루 종일 시체 같았다. 그리고 오늘 다 저녁에 김프로의 싱거운 전화를 받았다. 말은 안 했지만 녀석이 왜 싱거운 전화를 했는지 알 거 같았다. 이렇게, 그렇게, 저렇게, 이래도, 그래도, 저래도……(마지막 문장은 완성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