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으로 흥미롭게 듣고 있던 어떤 녹음 파일의 재생이 중단되는 순간, 나는 안다, 곧, 아내 표현에 의하면, 귀곡산장 같은 느낌적 느낌의 내 전화벨이 울리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소위 이른바 날도 화창한 ‘불금’인데 이따 저녁 때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친구의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오리라는 것을. 그런데 아니었다. 오늘도 친구 놈들은 다들 스크린골프나 치러 갈 것이다. 무엇을 상상하던 나는 그 이하를 듣게 될 것이다. 전화를 건 여자는 곧바로 원고를 읽기 시작한다. 대충 이렇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IBK 기업은행의 협력회사인 아무개 캐피탈인데요, 이번에 고객님들을 위해서 저렴한 금리로 대출해 드리는 상품을 안내해 드리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천 만원까지는 간단한 상담 후에 바로 대출을 해드립니다. 혹시 필요하신 자금이 있으세요?”
내가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은가? 안 그래도 은행에 돌아온 어음을 막느라 자금이 급하게 필요하던 차인데 마침 전화 잘 하셨다. 기왕 빌려주는 김에 10억원만 빌려주시라, 했을 것 같은가? 아니면 지금 담배값마저 떨어져 콱 죽어버릴까 생각중이었는데 사람 살리는 셈치고 2,700원만 입금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을 것 같은가? 그러면 귀찮은 스팸 전화야 금방 끊나겠지만 이 어찌 착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입만 열면 착한 일을 하는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유산을 많이 받아서요.” 내 대답을 들은 텔레마케터는 웃었다. 그 웃음이 씁쓸한 것 같기도 하고 기가 막혀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러고보니 이것은 착한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