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또 소주 당했다. 제법 많이 당했다. 도보로, 택시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소주 당했다. 더불어 글 안 쓴다고 구박 당하고, 깊이도 없이 이것저것 집적댄다고 면박 당했다. 어제는 소주당했는데…(일단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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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 바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내님이 새옷을 사주신다. 입어 보니 바지가 조금 길다. 정말이다. 조금, 조금, 아주 조금 길다. 바지 길이를 줄여서 갖다 주시면서 아내님이 중얼거리신다. 그러자 나는 새옷이고 뭐고 다 싫어졌다.
“바지가 갈수록 우리 아빠 바지처럼 되냐. 통은 크고 길이는 짧고. 엄마가 맨날 아빠 바지 다리면서 어쩌면 이렇게 다리가 짧냐고 하셨었는데…”
농구
저녁 먹고 나서, 아빠, 하고 녀석이 부르면 겁난다. 용건이 뻔하기 때문이다. 농구하러 가자는 거다. 이건 뭐 지가 우발적으로 생겨났지, 내가 절 계획적으로 제작한 것도 아니고. 이 추운 11월에, 밤이면 밤마다 농구 서비스라니. 야 그냥 천 원 줄게 참으면 안 될까.
텅, 텅, 텅, 맨땅에 농구공 튀는 소리가, 이파리를 거의 다 떨군 쓸쓸한 나무들과, 이제는 아이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아 쓸쓸한 그네와, 미끄럼틀과, 내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아무 것도 없었던 청춘의 기억에 반향한다. 반향. 리버버레이트. reverberate. 문자 쓰고 자빠졌네.
내가 아들에게 농구를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저도 나도 다 되도 않는 드리블과 엉성한 자세로 헛방만 죽어라 날리다, 것도 운동이라고 몸에서 땀이 살짝 나기 시작하면 야, 이제 세 골만 더 넣고 가자, 하고 들어 오는 것이다. 나는 좋은 아빠야, 이 밤에 자식하고 농구해 주는 아빠가 어딨어, 하는 것이다. 야, 니가 니 배 아파 낳은 니 자식하고 내가 왜, 놀아줘야 되냐, 하며 아내 앞에서도 좀 당당한 것도 같고.
아들에게 농구를 가르칠 깜냥이 안 되니, 초빙할 ‘지도자’ 들이 떠오른다. 그래, 그 쉐이를 데려다가 술 한 잔 먹이고 농구란 이런 것이다 한 수 가르쳐 달라 부탁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술값 많이 나올텐데. 이런 심정 때문에 운동선수 부모들이 코치나 감독들한테 깜박 죽는 것일 것이다. 오늘은 문장에 ‘것’자가 많이 들어갈 것 같네. 오매 잡것.
아들아, 인사드려라. 이 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아빠가 고등학교 다닐 때 농구 일진 먹으시던 분이시다. 아, 이럴 때 이상민이나 허재하고 친하게 지냈으면 좀 좋아. 아들아, 인사드려라. 이 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대한민국 농구 일진이시다. 이럴 수 있지 않는가. 인생 헛 살았다. 헐 살았어. 하긴 뭐 아들 축구 가르친다고 박지성하고 친구하고, 아들 야구 가르친다고 선동열하고 친구하고, 아들 수영 가르친다고 박태환하고 친구하고,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사실 농구에 얽힌 아픈 기억이 있다. 수 만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급의 경기다. 그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경기 내내 나는 헛물만 켜고 있다. 우리편 선수는 아무도 나에게 패스를 안 해준다. 그러면서 내가 어쩌다 공이라도 잡을라치면 서로 자기에게 달라고 난리다. 어림 없다. 나는 결국 애써 따낸 리바운드를 상대방 선수에게 패스 해준다. 날로 준다. 공 달라는 자세를 보니 아주 사람이 됐다.
나는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그녀가 제발 딱 한 골만 넣으라고 말한다. 나는 울부짓듯이 외친다. 야, 이 쉐이들아, 난 꼭 한 골을 넣어야 한단 말이다. 나도 골 넣고 연애 좀 해보자. 순간, 상대방 선수들이 불쌍했는지 수비를 멈춘다. 나는 혼자서 아무런 훼방도 받지 않고 공을 몰고 들어간다. 관중들도 그녀도 우리편도 상대방도 숨을 죽인다. 슛, 골인!
이었으면 그얼마나 좋았겠냐만, 그것마저 들어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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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씻어 말려 고이 모셔두었던 만년필을 꺼내 잉크를 넣었다.
어떤 가을 날
설명하자면 길다. 토요일, 여차저차 해서 딸과 둘만 남았다. 딸에게 영화를 보여주마 약속했고 보여줬다. 딸은 옆에서 쿡쿡, 킥킥, 웃었다. 나는 저 배우 예쁘네, 저놈아 웃기네, 이 대사 재밌네, 하며, 젊음을 시기했다. 팝콘은 너무 달았다. 고소한 맛을 줄까, 달콤한 맛을 줄까, 영화관 알바가 묻을 때, 인생은 고소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으니 쓴 맛을 다오, 라고 내가 머리 속에서 썰렁한 드립을 치는 사이, 딸이 냉큼 달콤한 맛을 달라고 말해 버렸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딸은 지 콜라 다 마시고 내 콜라까지 뺏어 먹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녁은 뭘 사줄거냐고 딸이 물었다. 뭐 먹고 싶니? 뷔페! 니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칼국수! 니가 이제야 정신이 돌아왔구나. 주말 저녁, 도로를 조금 신나게 달려 우리는 칼국수집엘 갔다. RPM이 순간적으로 5000을 넘나들었고, 딸은 옆에서 신난다고 말했다. 오늘은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만두 한 접시 시키면 너랑 나랑 세 개씩 먹을 수 있어. 그러네. 결과적으로 만두는 내가 네 개 먹고 딸은 두 개 먹었다. 칼숙수가 막 나왔을 때 나는 내 몫의 세 번째 만두를 막 입에 넣는 중이었고, 딸 몫의 만두는 두 개가 아직 접시에 남아 있었다.
칼숙수를 보자 딸은 곧바로 칼국수에 손을 댔다. 이거 하나 내가 먹어도 돼? 나는 칼국수에서 눈을 거두고 딸의 만두에 젓가락을 가져가며 물었고 딸은 선심쓰듯 그러라고 했다. 이제 보니 이 집 칼국수는 면발이, 노란 기저기 고무줄처럼 굵다. 나는 딸이 먹기 좋게 김치를 찢어주었다. 딸도 나도 별로 말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이것저것 말을 시키는 꼰대짓을 하고 싶지 않았고, 딸도 엄마를 닮아 말수가 적었다. 이상하게 조개가 잘았다. 이 조개도 수입한 건가. 더러 모래가 입안에서 까끌거렸다.
만두 얘기 아직 안 끝났다. 세숫대야 만한 칼국수 그릇에서 마지막 면발 두 가닥을 건져 올렸을 때에도 접시에 만두가 하나 남아 있었다. 딸은 배부르다는 말을 했다. 잘 하면 저것도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그 만두 먹을 거니? 응. 딸은 이제 좀 식었겠지, 하며 만두를 집어 들더니 한 입에 두 동강을 내고, 잠시 망설이다가 반을 간장 종지에 내려 놓았다. 아예 간장에 말아 먹지 그러냐! 여기다 마는 것보다는 낫지, 하며 딸은 칼국수 국물이 남아 있는 제 앞접시를 가리켰다. 딸이 마지막 만두 반쪽을 마저 처리하는 동안 나는 세숫대야 만한 칼국수 그릇에서 조개살 두 개를 건져 먹었다. 치사한 자식, 반만 줄 것이지, 라고 생각하면서. 아, 배부르다.
음식값을 치루고, 박하사탕을 하나 물고, 배를 퉁퉁 두 번 친 다음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이번 신호에 저 사거리를 기필코 건너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페달을 밟았고, 이 놈의 빨간 신호등은 두환이처럼 명도 지지리도 길다 생각하며 쓰리, 투, 원 카운트 다운을 했다. 이러는 날 아내는 재밌어도 했고 유치하게 여기기도 했는데 딸은 뭐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알게 뭐람, 딸한테 장가갈 것도 아닌데. 라디오에 스위치를 넣었다가 이내 꺼버렸다. 아빠, 나 노래 세 곡만 새로 다운로드 받게 해줘. 그러지 뭐.
지금은 0시 14분. 몇 분 전까지 침대에 엎드려 A4 용지를 수북이 쌓아놓고 뭔가 그려대던 딸은 불끄고 잠들어 있다. 아내가 애 시험공부 좀 시키라고 했는데 하나토 안 시켰다. 딸이 낮에 30분 공부했다고 자랑한 게 전부다. 끝으로 점심에는 김치와, 아내가 처가에서 가져온 오이지 무침과, 계란 후라이 하나 넣고 비빈 내 비빕밥을 딸이 맛있다고 뺐어 먹었다는 것도 적어둬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