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날씨란 인간이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이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그저 속수무책으로 그날 그날의 날씨를, 어쩌면 순간 순간의 날씨를 견디고 또 견뎌야 할 뿐이다.

언어의 용법 가운데 친교적phatic 용법이라는 게 있다. 더러운 세상, 대화나 하면서 친하게 지내보자는 것인데, 다만 정치나 종교, 섹스 이런 얘기는 피차 골치 아프니 그런 얘기는 정 하고 싶으면 니네 집에 가서 니네 집 금붕어 하고나 하던지 말던지 하시고 지금은 이를테면 만인의 공통 화제인 날씨 얘기나 하자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의 자세는 이렇다.

“당신에게 날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에 나는 또한 내가 당신과의 대화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당신을 이야기를 나눌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 자신은 反사교적이지 않다는 것을, 또는 당신의 개인적 외모에 대하여 조목조목 비판을 시작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 중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넌 어째 고쳐도 그 모양이니, 이런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니 날씨야 아무려면 어떤가.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다 얘기 거리가 된다. 맑은 날 애인과 헤어진 사람은 맑은 날 헤어지는 게 비오는 날 헤어지는 것보다 다섯 배는 슬프다고 하고, 비오는 날 하관하는 유족은 비가 와서 고인을 떠나 보내는 것이 더욱 애닯다 하는 것이다.

유세차 모년삼월모일, 창밖에 때 아닌 눈이 내리니 그나마 붙잡고 날씨 얘기라도 할 사람 하나 곁에 없는 우리네 신세가 급 처량해진다.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날씨 얘기 할꼬. 그러나 언어의 친교적 용법이고 뭐고 다 부질 없으니 어버이 살아 계실 때 전화라도 한 번 더 드리는 게 낫다.

황사

토요일 오후, 자제분들을 모시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 송구스럽게도 아내마마께서 운전을 하옵신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생애와’ 트와잇라잇의 벨라를 생각한다. 오, 벨라 피 한 방울만 마셔봤으면. 그때다. 버스전용차로 단속 카메라에 속도감시기능이 있는가? 운전에 몰입하신 아내마마께서 하문을 하신다. 모른다. 그런 세속잡사를 내가 어찌 아나. 잘 모르겠사옵니다. 무성의한 내 대답에 아내마마께서 질주본능을 억제하시는 게 느껴진다. 세상의 모든 길 아우토반이 되거라. 문 열어라 피야. 문 열어라 피야. 마늘과 십자가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피야. 문 열어라 피야. 아니, 이 마당에 미당은 또 왜 떠오르나. 나는 다시 오, 벨라, 나의 이사벨라만 생각하기로 한다. 뉴문은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그때다. 뭐야? 여기 과속단속 카메라가 있는데 이 네비게이션은 왜 안내를 안 하지? 아내마마께서 혼자 말씀을 하옵신다. 하마터면 큰 일 날뻔했다. 그러고보니 네비게이션 업데이트 해드린 지가 꽤 지났구나. 이런 불충한 남편을 봤나. 집에 가면 당장 해드려야겠다. 런던의 노란 안개와 가스등 불빛이 창밖을 휙휙 지나간다. 어, 취한다.

21세기의 중세적 상상력

정신 나간 소리지만,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돈다. 비행기 한 마리가 인천공항을 이륙해 동쪽으로 날아간다. 목적지는 하와이다. 비행기가 목적지를 향해서 힘들게, 힘들게 동쪽으로 날아가는 동안, 하와이도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는다. 하와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는 지구를 얻어 타고, 어딜 오냐고, 오지 말라고 멀리, 멀리 도망간다. 그러나 지까짓게 가봐야 어딜 가겠는가. 뛰어봐야 하와이지. 마침내 도망가던 하와이를 따라잡은 비행기 한 마리는 호놀룰루 공항에 가볍게 착륙한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때린다, 부순다. 말로만 듣던 와이키키 해변의 파도가, 해에게서 소년에게, 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돈다. 아쉽지만 하와이 공항을 마지못해 이륙한 비행기는 이제 서쪽으로 날아간다. 목적지는 한국이다. 비행기가 느릿느릿 서쪽으로 날아가는 동안, 한국도 가만히 앉아서 손 놓고 기다리지는 않는다. 한국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는 지구를 얻어 타고, 어서 오라고, 날 두고 어디 갔다 왔냐고, 버선발로 비행기를 마중, 나온다. 드디어 비행기와 한국은 중간에서 만난다. 감격에 겨운 한국은 비행기를 와락, 껴안으려고 달겨들지만, 어딜, 비행기는 살짝 피한다. 어딘가 ‘회피 연아’적이다. 그러나 좁아터진 이 땅에서 가면 어딜 가겠는가. 피해봤자 한국상공이지. 비행기는 체념하고 인천공항에 착륙한다. 이로써 중세인을 위한 ‘니가 가라, 하와이’ 패키지 여행은 끝나고, 사람들 일상으로 돌아간다.

1.
지난 겨울 여주는 너무 추웠다. 영하 25도로 기온이 떨어진 어느 날 밤, 평소대로 밖에서 자던 동네 똥개 몇 마리가 조용히 얼어 죽었다. 미안하다. 내가 니 생각을 미처 못했구나. 웅크리고, 웅크리고, 웅크리다, 죽어 갔을, 자신이 밥 먹여 키우던 개의 싸늘한 몸뚱이를 보며 개주인들은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2.
엠본부에 아직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텔레비전을 안 보고 산지가 제법 돼서 저런 세상사에 어둡다. 덕분에 우리집 ‘자제분들’도 대중문화생활을 거의 못하고 있다. 이 점은 애비로서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텔레비전 보는 것,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

아무려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라는 제목을 접할 때마다 그때는 왜 말 못했는데? 이제는 말해도 안전하다 이거지? 그런데 지금은 속 시원하게 말하는 거 맞아? 겸손하게, <이제야 겨우, 그것도 모기 소리 만하게, 말한다>로 타이틀을 바꾸는 게 어때? 하면서, 오래된 표현으로, 마음이 한 없이 삐딱선을 탔던 기억이 있다.

죽지 않고 버티면 언젠가 <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조금은 자조적인 제목으로 방송이 오늘의 여러 사태를 말 할 수 있는 날이 오려는가?

3.
……

에라스무스

엊그제 삼일절 태극기가 축 늘어져 있던
우리동네 아이들 학원 버스 기다리는 곳 가로등 기둥에
내 자식들 무상으로 밥 먹여주는
국가가 트럭 타고 와서 꽂아둔
민방위 깃발이 오후 2시의 사이렌을 예고하며
불안스레 펄럭이고 있다
소심한 에라스무스는 이쪽저쪽 갈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