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란 인간이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이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그저 속수무책으로 그날 그날의 날씨를, 어쩌면 순간 순간의 날씨를 견디고 또 견뎌야 할 뿐이다.
언어의 용법 가운데 친교적phatic 용법이라는 게 있다. 더러운 세상, 대화나 하면서 친하게 지내보자는 것인데, 다만 정치나 종교, 섹스 이런 얘기는 피차 골치 아프니 그런 얘기는 정 하고 싶으면 니네 집에 가서 니네 집 금붕어 하고나 하던지 말던지 하시고 지금은 이를테면 만인의 공통 화제인 날씨 얘기나 하자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의 자세는 이렇다.
“당신에게 날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에 나는 또한 내가 당신과의 대화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당신을 이야기를 나눌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 자신은 反사교적이지 않다는 것을, 또는 당신의 개인적 외모에 대하여 조목조목 비판을 시작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 중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넌 어째 고쳐도 그 모양이니, 이런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니 날씨야 아무려면 어떤가.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다 얘기 거리가 된다. 맑은 날 애인과 헤어진 사람은 맑은 날 헤어지는 게 비오는 날 헤어지는 것보다 다섯 배는 슬프다고 하고, 비오는 날 하관하는 유족은 비가 와서 고인을 떠나 보내는 것이 더욱 애닯다 하는 것이다.
유세차 모년삼월모일, 창밖에 때 아닌 눈이 내리니 그나마 붙잡고 날씨 얘기라도 할 사람 하나 곁에 없는 우리네 신세가 급 처량해진다.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날씨 얘기 할꼬. 그러나 언어의 친교적 용법이고 뭐고 다 부질 없으니 어버이 살아 계실 때 전화라도 한 번 더 드리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