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중세적 상상력

정신 나간 소리지만,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돈다. 비행기 한 마리가 인천공항을 이륙해 동쪽으로 날아간다. 목적지는 하와이다. 비행기가 목적지를 향해서 힘들게, 힘들게 동쪽으로 날아가는 동안, 하와이도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는다. 하와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는 지구를 얻어 타고, 어딜 오냐고, 오지 말라고 멀리, 멀리 도망간다. 그러나 지까짓게 가봐야 어딜 가겠는가. 뛰어봐야 하와이지. 마침내 도망가던 하와이를 따라잡은 비행기 한 마리는 호놀룰루 공항에 가볍게 착륙한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때린다, 부순다. 말로만 듣던 와이키키 해변의 파도가, 해에게서 소년에게, 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돈다. 아쉽지만 하와이 공항을 마지못해 이륙한 비행기는 이제 서쪽으로 날아간다. 목적지는 한국이다. 비행기가 느릿느릿 서쪽으로 날아가는 동안, 한국도 가만히 앉아서 손 놓고 기다리지는 않는다. 한국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는 지구를 얻어 타고, 어서 오라고, 날 두고 어디 갔다 왔냐고, 버선발로 비행기를 마중, 나온다. 드디어 비행기와 한국은 중간에서 만난다. 감격에 겨운 한국은 비행기를 와락, 껴안으려고 달겨들지만, 어딜, 비행기는 살짝 피한다. 어딘가 ‘회피 연아’적이다. 그러나 좁아터진 이 땅에서 가면 어딜 가겠는가. 피해봤자 한국상공이지. 비행기는 체념하고 인천공항에 착륙한다. 이로써 중세인을 위한 ‘니가 가라, 하와이’ 패키지 여행은 끝나고, 사람들 일상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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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1. 예전에 홍콩을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팔자에도 없는 무역질 하러 다닐 때, 그런 생각을 했었드랬죠. 몇백년 전이었으면 몇날 며칠 포카나 치면서 세월아 네월아 무역질 했을텐테…세시간 만에 도착하다니…이거 넘 재미없자나? 난 정말이지 콩사탕 같은 21세기가 싫어요…

  2. 걸식/ 호랑이 대마초 피던 시절에는 여그서 거그 작업실까지 다녀 오는 것도 최소 1박2일 코스였을 것이오. 오가다가 주막에서 하룻밤 ‘류’하고…
    그나저나 부지런하시구랴, 꼭두새벽에 이 누추한 블로그엘 다 왕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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