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고 시끄러운 신호 sparse & noisy signal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 Event Horizon Telescope 으로 블랙홀 사진을 찍은/합성한 Katie Bouman이 칼텍 Caltec 에서 강연하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았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처리해야 했던 신호가 아주 성기고 아주 잡음이 많았다고 말하는 것은 용케도 알아들었고, 그 표현에 뭔가 시적인 데가 있다고 느꼈다. 과학은 시하고 내통하는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아무거나 아무데나 갖다붙이고 싶어졌다. 당신의 신호는 가물가물하고, 게다가 주변은 시끌시끌하다니! 소주 한 병의 안주 단어로는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 않는다. 이런 얘기, 듣는 귀가 이제는 없다. 당신에게 내 근황을 말해주겠다. 나는 물리학 책 읽고, 수학 책 일고, 철학 책 읽고 그러면서 지내고 있다. 심오한 거 읽는 거 아니다. 정적분이나 상대성이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뭐 이런 거 읽는다. 벚꽃 구경도 좀 했다. 시집 같은 거 안 사고, 소설도 읽지 않는다. 아이폰에 메모는 곧잘 하는데 따위넷은 잊었다.

애 셋 가운데 두 분은 대학생이 되셨다. 어엿한 거 같지는 않다. 막내는 엊그제  4.16에 제주도에 있었다.

25시

’25시’란 낱말은 이제 거의 쓰이지 않는다. 80년대에는 무려 ‘시어’로도 쓰였다. 나는 한번도 써본 적이 없다. 마르크스. 엥겔스.

일기

카톡으로, 누군가의 대표이사 취임 소식을 전해 듣고, 카톡으로 누군가의 부음을 듣는다. 일요일 아침이고 아내는 성당에 간다. 큰 아들은 친구집에서 자고 온다 했다. 막내는 식탁에서 빵 먹는다. 딸은 잔다. 입안에 남은, 식은 커피맛이 쓰다. 축하합니다, 라는 문장이 단톡방에 몇 개 뜬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문장이 잠시, 다른 단톡방에 줄지어 뜬다. 나는 누군가의 블로그의 오래 전의 글 몇 개를 검색해서 읽는다. 가슴 아픈 글이다. 나는 위로하는 문장도 축하하는 문장도 쓰지 못한다. 고양이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하얗다. 나는 부끄럽고 죽고 싶고 살고 싶다.

오늘의 문장

“와인은 말이 많아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다양한 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에는 조심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분위기가 달궈지기 시작하면 요란한 설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많다.”

—오래 전 어느 출판사에서 받은 증정본, 91쪽

토요일 아침

감기 걸린 자식의 기침 소리가 방안으로 파고 들어 오는 토요일 아침

새벽에 깨어 유기화학 유튜브 강의를 본 토요일 아침

지난 밤 똑똑 물 틀어놓은 베란다 수도가 얼었나 얼지 않았나 궁금한 토요일 아침

윗집에서 피아노 건반 한두 개 두드리는 못생긴 소리가 들려오는 토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