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드립

“방정환님을 위해서라도 꼭 어린이날 선물을 얻고 말거야. 고생해서 만드신 어린이날이 헛 되지 않게 할거야.” 어린이날,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고 집에서 뜻 깊게 보낸 다음, 맨밥에 가까운 저녁을 꾸역꾸역 먹고, 마트에 가는 엄마를 따라 나서는 우리의 어린이. 각오는 결연하다만 갖고 싶은 게 하필이면 비비탄총이니 과연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인가.

Move to Trash

내 비록 한 때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시리즈 따위를 원서로 읽어 제낀 화려한 전력이 있기는 하나 판타지는 내 것이 아니다. 하여 아이들이 <나니아 연대기> DVD를 빌려다 볼 때 어깨 너머로 영화를 잠깐 봤을 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하필이면 시공사에서 나온(시공사나 시공주니어나 그게 그거니깐) 벼개 같은 <나니아 연대기> 번역서를 봤을 때는 그것도 책은 책인 까닭에 잠시 마음이 동하기는 하였으나 있는 자제력과 없는 자제력을 총동원해 ‘득템’하는 걸 꾹 참았다.

며칠 전 DVD 하나 빌려 보게 해주면 아빠 안 잡아 먹고, 삼 년 동안 착하게 지내겠다고 막내가 간청을 하길래 허락을 했더니만 어서 굴러먹다 들어온 건지 모를 개뼉따구 같은 <나니아 연대기 2>를 또 빌려왔다. 그러더니 지 형아와 함께 내리 두 번을 보는 것이었다. 이건 뭐 <나니아 연대기>가 무슨 <길버트 그레이프>도 아니구 뭐 볼 게 있다구. 아이들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족속인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집에 팝업북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책 갈피 사이사이에 이상한 장치를 해서 끄트러미를 잡아당기면 성문도 열리고 변신도 하고 그러는 값 비싼 외제 책이 한 권 굴러다니는데 그것이 하필이면 <나니아 연대기>이다. 몇년 전에 지인이 미합중국 다녀오는 길에 아이들 선물용으로 사다준 것인데 다들 영어 까막눈이니 읽을 턱이 있나. 그냥 장식용으로 거실에 꽂아두었을 뿐이다. 그런데 DVD를 다 본 막내가 그 책을 뽑아들고 영화 내용과 비교 분석을 하다가 성이 차질 않는지 내게 가져와 이렇게 말했다. 아빠, 이거 읽어줘. 영어로 말고 한국말로!

자식이 책 읽어 달라는데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더듬거리며 일부만 읽어주었다. 읽다보니까 영화는 2편까지 나왔는데 그것으로 연대기가 끝난 게 아니었다. 한 마디 아니 중얼거릴 수가 있나. ‘이거 한국말로 된 대따 두꺼운 책도 있는데.’ 내 중얼거림을 듣더니 막내가 묻는다. “그림은 하나도 없고 글씨만 잔뜩 있는 책?” 나는 그렇다고 말했고, 녀석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나니아 연대기>도 북유럽 신화처럼 만화책으로 나오면 좋겠지, 라고 약을 올려주려다가 말았다는 걸 덧붙여 두어야겠다.

그런데 상황이 종료된 게 아니었다. 며칠 후 무슨 얘기 끝에 아 이 자식이 글쎄, 아빠, 나 어린이날 선물로 그 두껍다던 나니아 연대기 책 사주라,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식이 책 사달라는 데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러마 대답은 했다만 그렇다고 하필이면 시공사에서 나온(시공사나 시공주니어나 그게 그거니깐) 벼개 같은 <나니아 연대기>를 꼼짝 없이 사줄 수는 없어 강가딘에 접속해서 쓸만한 중고로 알아보니, 전반적으로 헌 책 느낌이 물씬 풍기기는 하지만 줄친 곳은 없다는 ‘벼개’가 마침 있대서 주문을 하려는데, 중고책은 무료배달이 아닌 것인지 택배비 2천원이 붙어 있다.

하여 다른 책 한 권을 깍두기로 끼워 넣어 기어이 택배비 항목을 무료로 만들고 그동안 강가딘에 한 푼 두 푼 적립해 둔 포인트까지 다 사용한 덕분에, 오매불망 <나니아 연대기>가 드디어 배달돼 왔다. 책 상태를 살펴보니 저으기 만족스럽다. 거의 새 책이다. 옜다, 먹고 떨어져라, 이눔아!

아울러 택배상자에는 제6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컨설턴트>와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를 소개하는 코딱지 만한 수첩이 같이 들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불후의 명작을 여태 안 읽고 뭐하고 살았나 싶은 심사평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두 소설의 도입부와, 그럴싸한 줄거리가 인쇄돼 있다. 뒤가 궁금해 죽겠다. 입맛만 버렸다. 단골 도서관 사이트에 접속해서 검색해 보니 전자는 목록에 없고, 후자는 두 권이 있는데 둘 다 대출중이다. 괜찮다.

Draft Saved at 12:54:47 pm.

“엄마, 나 도장에서 치킨 먹었다아. 나만 두 개 먹었다아. 엄마, 나 잘했지? 근데 치킨만 먹었지 무는 못 먹었어. 젓가락이 없었거든.”

노는 것들을 용서하자

띵땅띵땅 띵땅띵. 12시 5분, 핸드폰이 운다. 딸아이 전화다.
아빠, 난데. 나 지금 학교 끝났는데 2시 반까지만 놀다가도 되지?
그래라. 그런데 점심은 어떡할래?
응, 학교에서 실과 시간에 뭐 만들어 먹어서 안 먹어도 돼.
알았다.
띡띡띡띡. 조금 있으니 아들녀석이 현관자물쇠를 해제하는 신호음이 들린다.
왔어요.
왔냐?
아빠, 근데 나 나가서 좀 놀다와도 되지?
그래라. 점심은?
괜찮아. 배 안 고파.
그래도 뭐 좀 먹어야지.
그러면 좋고.
부엌에서 뭐 먹일 거 없나 뒤지는데, 따르릉, 이번에는 집전화가 울린다. 아들녀석이 받는다.
컬렉트 콜인데 계속 통화하려면 버튼을 누르라는데?
얼른 눌러.
막내일 것이다. 나는 손에든 누룽지를 녀석에게 건네고 수화기를 받아든다.
여보세요?
아빠, 나 언인데. 세훈이네서 좀 놀다가도 되지?
그래라.
다녀올게요.
아들녀석이 나가면서 인사한다.
그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