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놈, 나는 놈

어제 뜻한 바 있어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금지시켰더니, 오늘 학교 갔다 와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막내, 심심해서 죽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나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파고다 공원─탑골 공원인가?─에 다닐 수도 없고, 사정인즉슨 딱하다면 딱하게 되얐다. 아무려나 조용히 책을 보길래 역시 컴퓨터는 자녀 교육의 적이야 하면서 내심 흡족해 하고 있었는데, 웬 걸, 이건 뭥미? 무슨 진리를 깨친 자처럼 한 마디 하더니 바로 실행에 옮기고 자빠졌다.

“아, 심심하지 않을 방법을 찾았다. 그건 바로 자는 거야.”

뭐, 그러시던지. 잘자라, 아들아. 아빠 꿈 꾸렴!

어록

“그 이름도 찬란하다, 티눈약.”

“칼국수여, 드디어 내 입이 널 맛볼 수 있겠구나.”

닭다리네개연구소 3

“안드로메다 옆 닭다리세개연구소에서…”

아이들이 대화를 하면서 이런 고차원적 어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니 이 어찌 아니 가르친 보람이 없다 하지 아니 할 수 없지 않겠지 않는가. 어라? 그런데 난 분명 닭다리네개연구소라고 했는데 닭다리 하나는 어디 갔나? 저것들이 설마 나 몰래…

포톤이여, 러시하라.

서로가 서로에게 장난감인 엽과 언, 월요일 아침부터 밥상머리에서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전술에 대한 심오한 대화를 나누며 자꾸만 포톤 러시, 포톤 러시, 한다.

아니, 포톤 러시라니! 그게 말이 돼? 그렇잖아도 까까판 마음을 꽊 억누르며 끙 하고 있던 나, 드디어 도화선에 불을 당긴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뉴클리어 런치 디텍티드! 쓰리, 투, 원, 발쏴아아!

야. 이 무식한 것들아, 포톤이 어떻게 러시를 하냐? 포톤이 러시를 하면 바위도 러시를 하겠다. 하라는 사서삼경 공부는 안하고 아침부터 돼도 않는 용어로 돼도 않는 스타크래프트 얘기나 하고 자빠졌구, 참 자알 하는 짓이다. 아주 장래가 촉망된다. 엉. 대체 니들은 누구 닮아 그러냐. 엄마, 닮았냐? 엉? 그 나이 먹도록 사전에서 러시 한 번 안 찾아 보고 여태 뭐하고 살았냐? 엉? 그러고도 니들이 지식인이야. 니들이 아침밥을 먹을 자격이나 있어? 엉? 에잇, 앞뒤로, 안팎으로, 전국이 골고루 무식한 것들 같으니라구.

애들은 포톤이 러시 할 수도 있지, 뭘 그딴 걸 가지고 흥분하시고 그러시나, 하는 얼굴로 날 빤히 쳐다 본다.

러시는 말야, 우르르 달려가는 거야. 너희 바위가 우르르 달려가는 거 봤어? 못 봤지? 포톤이 러시를 할 수 있으면, 사대강 주변 산에 사는 나무들이 우르르 강가로 달려 내려가 포크레인을 박살 내고 바지선을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거라고. 러시 하고 싶은 데 그걸 못하는 심정 니들이 알기나 알어? 엉? 그건 말야 대시 하고 싶은 데 대시 못하는 거 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야. 알어. 엉? 엇따 대고 포톤 러시야, 포톤 러시가.

애들은 포톤이 러시 좀 하면 어때? 이래서 기성세대는 안된다니까. 역시 지구는 우리가 켜야 한다니까. 그나마 우리 아빠는 좀 다른 줄 아닌데 똑깥아. 역시 꼰대야, 하는 얼굴로 날 빤히 쳐다 본다.

그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앗, 뜨거라, 이게 아닌갑다, 정신을 차린 나는, 나처럼 이제 언어의 와꾸가 꽉 짜여진, 유식하게 말해서 통사규칙이 확고하게 굳어진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설령 삼신 할매가 넷째를 점지해 주신다 하여도, 포톤과 러시를 결합하여 포톤 러시라는 조합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라고 데에 생각이 미치자 무기력하게 분노를 가라 앉히고, 다시 나만의 세계로, 독특한 세계로, 빠져들어 가고 마는 것이었던 거디었던 거시였다.

p.s.
다시 보니 애들 보는 만화책에 포톤 러쉬라는 표현이 있었음.

저 디엔에이는 누구의 디엔에이인가?

뭐 배울 게 있다고 학교에 가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엄동설한에 집에서 스타크래프트나 하지 굳이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멀쩡하게 인사하고 나간 언이, 모닝 커피 한 잔 고독하게 마시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그러니까 한 10분 쯤 있다가 다시 돌아 와 제 엄마를 찾는다. 안방에서 꽃단장을 하고 있던 아내, 자식 새끼 목소리에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버선 발로 뛰어나온다.

엄마, 책가방!

오호, 장하다. 뭐 배울게 있다고, 잊고 갔으면 그냥 갈 일이지 가다 말고 굳이 다시 돌아와 책가방 챙기면서 까지 학교에 가겠다는 건지 그 연유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녀석이 다시 신종 플루가 창궐하는 국립보통학교를 향해 장도에 오르고 난 뒤, 우리 부부는 서로 저 자식이 상대방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갈 곳도 없는 엄동설한 이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