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패배

아내가 삶아준 국수를 먹으며 누들, 누들 그랬다. 이어 우든 찹스틱, 우든 찹스틱 하다가 발동이 걸리자 영어가 술술 나왔다. 이를테면 이런 품격 있는 문장들이. 마이 프레셔스 파더 이즈 존나리 핸썸, 이라거나 마이 푸어 마더 이즈 어 워먼. 식탁이 화기애매해진 가운데 아이들이 반응을 보였다. 막내도 영어를 술술 했다. 마이 파더 이즈 베리 베리 베리 낫 핸썸. 돼먹지 못한 놈이다. 공격을 안 할 수가 없다. 마이 리틀 보이 이즈 베리 토커티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막내는 말이 많았고 내게 지지 않으려 했다. 그렇다면 네가 모르는 단어를 말해주리라 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마이 푸어 리틀 선이즈 베리 이리테이팅. 이리테이팅을 알 수가 없으니 내가 이길 게 뻔했다. 그랬는데 아니었다. 내가 졌다. 내가 저 고상한 영어 문장을 독일식과 일본식을 포함한 그러니까 유창한 발음으로 말하는 순간 막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왓 더 헬! 이제 막 국수를 한 입 먹고 오물거리던 아내는 메두사 머리카락처럼 국수를 뿜을 뻔했다.

재미가 甲이다

자식 한 분은 만화 보고 계시고, 다른 자식 한 분은 아이패드 하고 계시다. 차마 아름다운 광경을 보니 가학취미가 발동하여 두 분을 강압—물론 강압은 없었다. 오, 정수장악회여—적으로 모시고 대저, 문장에 대해서 아주 수준 높게 속성으로 설명해드린 다음에 5분 내로 각각 아무 거나 세 문장 씩을 써서 바치시지 아니 하시면 안타깝지만 이 비정한 애비가, 눈물을 머금고, 만화고 아이패드고 뭐고 다 금지시켜 드리겠다고 선언하였더니 자식놈님들께서 다음과 같은 명문장들을, 일필휘지로, 빠름, 빠름, 빠름, 그러니까 롱 텀 에벌루션의 속도로, 작성하시고는, 자기들끼리 킬킬 거리시면서, 뭔가 승리감에 젖어, 다시 하시던 일에 매진하시는 고로 나는 사이클 좇던 미니벨로 마냥 씁쓸하게 입맛만 떱하고 다시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분들께서 성의껏 급조하신, 거룩하신 문장님들을 만나 보자.

슬램덩크는 만화이다.
슬램덩크는 재미 있다.
슬램덩크는 농구 이야기이다.

아이패드는 애플이라는 화사에서 만든 기계이다.
아이패드는 성능이 좋다.
아이패드는 재미 있다.

아, 독서고 교육이고 다 필요 없다. 고저 재미가 甲이다. 재미신을 영접하라.

태풍전야

자식 다 키웠다, 이제. DVD 빌리러 다녀오는 길에 누가바 사다가 상납도 할 줄 안다.
“뭐 빌려 왔느냐?”
“마이 웨이요.”
제목을 들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나는 기다렸다가 졸라맨인지 볼라벤인지 태풍 구경이나 해야겠다.
“가서 니들끼리 보거라.”
“네.”
하드를 한 입 베어문다. 맛있다. 북경원인 뇌수 맛이다.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난다. 누구냐, 내 방문 앞에 와서 선 너는? 딸이다.
“아빠, 저 누가바 한 입만 주세요.”
아깝지만 줬다. 딸은 내 누가바를 양심적으로 한 입 깨물고 돌려준다. 생각해보니 딸에게도 제 몫의 누가바가 있었을 거 같다.
“너 니 꺼 다 먹고 아빠 꺼 뺏어 먹는 거냐?”
“응.”
“왜?”
“나는 공평하니까. 내가 쟤들 것도 한 입 씩 뺏어 먹었거든.”

이렇게 대답하며 녀석은 쪼르르 가버렸다. 나는 헐, 소리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