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추억의 법칙

미안하다. 내 추억은 내꺼다. 샘나는 건 알겠지만 행여 달라하지 마라. 어림없다. 경제도 어려운데 추억하나 가지고 뭘 그러느냐 하지마라. 호빵은 줄수 있다. 그러나 추억은 안 된다. 이거 내가 절대 야박한 게 아니다. 사실 추억은, 주고 싶어도 못 준다. 추억이란 그런 거다. 내 추억은 온전하게 나의 것인 것이다. 그러니 모쪼록 남의 피 같은 추억 탐내지 말고, 자신의 추억을 어쩌면 장님처럼 더듬을 일이다.

어려서다.
Continue reading

02 소통의 법칙

저 산, 노을이 비치고
온몸에 금이 가요.
사방에서 노을이 떠요.
살고 싶어요.
사람이 죽으면 노을에 묻히나요?
─ 신대철, “처형 3” 中에서

우리는 모두 개체이다. 즉,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절대 나 너 아니고 너 나 아니다. 너도 나도 다 하나의 개체에 불과한 우리는 ─ 아니, 어쩌면 영원히 우리는 없으므로 ─ 너와 나는 오늘도 소통을 꿈꾼다. 그래. 소통은, 결국은 개체인, 개체일 수밖에 없는, 빌어먹을!, 우리 모두의 꿈이다.

그런데 소통은 해서 무엇 할 것인가? 네가 어느 날 본,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때 거기에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산문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구라를 풀고, 아, 악을 쓰고, 아아, 어쩌면 울고불고 하며 마침내는 나에게, 전후좌우 천지사방이 꽉꽉 막혀있는, 이 미련곰탱이 같은 나에게, 네가 본, 그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사람 환장하겠는, 그 지랄 같은, 타는 저녁노을을 보여주었다. 고맙다. 너 아니면 그 좋은 걸 내가 영 못 볼 뻔 했다. 그런데 그렇게 진저리치며 맨살로 이 불통의 세상을 박박 기며 소통은 해서 무엇 할 것인가? 온몸에 금이나 갈 것인가?

물론, 소통은 어렵다. 그래서 소통은 가치이고 의미이다. 제발 나를 알아줘. 제발 나를 읽어줘. 제발 내말을 들어줘. 제발 나를 이해해줘.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줘. 내가 표현하지 않아도 느껴줘. 제발. 제발. 제발. 야, 이 먹통아. 그게 아니야. 그건 오해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넌 몰라. 넌 말해줘도 몰라. 넌 도대체 눈 뜨고 뭐 본거야. 귀 달고 뭐 들은 거야. 오죽하면 아예 내 가슴팍과 네 가슴팍에 쇠 파이프 하나 팍 박아 서로 연결해 버리고 싶을까.

우리는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연애하지 못한다. 소통이란 ‘존재의 공유’이니 도무지 서로 공유할 게 개 코딱지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과는 손을 잡아도 전기가 찌릿찌릿 흐르기는커녕 후보자 유권자에게 악수 청하듯 아무런 느낌이 없고 외려 세균 옮을까 겁만 난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이런 사람과는 예쁜 것도 잘생긴 것도 돈 많은 것도 웃기는 것도 다 한철이다.

그렇다면 잘 통하는 사람과는 연애가 잘 될까? 그래야 하는데 문제는 이게 아닌 것 같다는 거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소통이 잘되는 사람에게 주고 뺨 맞은 적이 무릇 기하이며 소통 잘되는 도끼에게 발등 찍힌 적이 무릇 기하인가? 뭐시라? 당신은 그런 적이 없다? 잘났다. 정말. 팔뚝도 굵고 똥도 굵다. 이제부터 당신과 나, ‘우리’ 아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잘 알겠는데,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아, 아니다, 외로운 건 좀 청승맞으니, 당신이 얼마나 고독한지, 혹은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는지, 혹은 당신이 겉으로는 늘 웃고 있지만 알고 보면 그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나는 정말 ‘느무느무’ 잘 알겠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무관심한가. 어째서 눈길 한번 주지 않는가. 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가. 왜 내 손잡아 주지 않는가. 당신 왜 나에게 쌀쌀맞은가. 당신, 나쁘다. 백날 이래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거, 말짱 꽝이라는 거, 이거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서둘러 깨달아야 한다. 상대는 내가 저에게 갖는 그런 관심에 관심이 없다. 소통은 없다. 소통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어쩌란 말인가. 안 통해도 안되고 잘 통해도 안되면 그럼 어쩌란 말인가, 연애 한번 하지 못하고 처녀귀신 아니면 몽달귀신 노릇이나 잘 하라는 말인가, 하고 당신은 묻는다. 낸들 아나. 당신 연애 못하는 걸 왜 나한테 묻나. 그래도 연애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소통하지 말라. 함께 하라. 함께 노을 보고 함께 영화보구 함께 뒷골목 헤매고 함께 모의 하고 함께 궁리하고 함께 작당하고 함께 죄짓고 함께 살고 그래라. 그것 밖에 없다.

꼭 연애가 아니더라도 소통은 중요하다. 소통의 문제는 연애의 문제이기 이전에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 이걸 누가 알겠는가. 다만 이제 내가 알겠는 건 이거다. 안타깝지만 진실은 이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은 없다.

01 몽상의 법칙

당신은 최근에 몽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비옵니다. 비옵니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로또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옵시고 다만 꽝에서 구하옵소서. 이거 당첨되면 그 길로 사표 쓰고, 그 길로 공항으로 나가, 그 길로 외국으로 뜨는겨. 떠서는 바람따라 구름따라 실컷 떠돌아 다니는겨. 훨훨~. 야무져서 좋다만 이러는 거 이거 절대 몽상 아니다. 백일몽이다.

하여 내 다시 묻노니, 당신은 최근에 몽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지난 꿈에 ‘나영이’를 만났는데 날 보고 씨익 웃드라. 나 아주 극락왕생 하는 줄 알았다. 이러는 거 이거 절대 몽상 아니다. 병이다. 개꿈이다.

그럼 몽상은 뭘까? 그건 꿈 같은 어떤 것이로되 허황한 백일몽과는 다르고 17대 1로 맞짱 뜨는 개꿈과도 다르다. (물론 이들이 어떻게 다른 지 나는 잘 모른다.) 몽상은 그런 게 아니다. 몽상은 당신이 당신의 파트너를 ─ 그 파트너가 당신의 애인이든 피앙새든 반려자든 웬수탱이든 뭐든 간에 아무튼 그 상대방을 ─ 꿈꾸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꿈은 그립다거나, 만나고 싶다거나, 손잡고 싶다거나, 만지고 싶다거나, 쓰다듬고 싶다거나, 섹스하고 싶다거나 하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일테면 그건 존재와 존재의 정면충돌 같은 것인데, 그렇다고 첫 눈에 스파크가 일어 감전된다거나, 일순 불꽃이 일며 점화된다 거나 하는 건 아니다.

아니다. 솔직해지자. 내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자꾸만 중언부언하는 건 몽상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확실하다. 연애는 몽상이다. 아니다. 사람을 몽상하는 것이 연애다.

연애 불변의 법칙: 序

#1 낮
짝퉁 기획서 하나 쓸 일이 있어서 오랜 만에 <<마케팅 불변의 법칙>>을 슬렁슬렁 넘겨 보았다. 곧 뭐, 별 거 없네, 하고 다시 쳐박았다.

#2 밤
운동을 마치고 ─ 오늘은 무려 열다섯 바퀴나 돌았다. ─ 샤워를 하다가 문득 아, “연애(결혼이 아니다) 불변의 법칙”을 연재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