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바꾸면 웃긴다

영어에 두음전환(頭音轉換 spoonerism)이라는 용어가 있다. 영국의 권위 있는 귀족 순수한 혈통 루이 윌리엄스 세바스챤 주니어 3세의 친구인 윌리엄 A. 스푸너(1844~1930)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용어라고 한다. 이거 별거 아니다. 이런 거다. 즉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는 social position을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pocial sosition으로 바꾸어 발음하는 것이다. 두 단어의 초성인 s와 p가 서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 밖에도 이런 예들이 있다.

“a well-boiled icicle” for “a well-oiled bicycle”
“a queer old dean” for “a deer old queen”
a crushing blow를 a blushing crow라고 하는 경우 등

한국어는 표기체계자체가 음절 중심이라, 위의 예에서처럼 순수하게 ‘초성’만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다만 ‘초성 + 중성 (+ 종성)’을 포함한 한 음절 전부의 순서를 바꾸면 이와 위의 예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는 한다. 이걸 넓은 의미의 스푸너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래서 <남아일언은 중천금이요 일구이언은 이부자지라>와 <간음빙자혼인죄>같은 말장난이 생겨난다. 오호, 그리고 보라. 이 순 건달! 혹은 진짜 양아치! 혹은 이 썰렁한 작업남! 아무튼 웃기는 짬뽕 같은 오 이 남자!

__오, 아가씨. 커피 있으면 시간 한 잔 할까?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무실의 부속 화장실의 변기 앞 벽에는 이런 구절이 붙어 있다. 조금 전에 보고 왔다.

__휴지는 변기 속으로!

내가 뭐하고 왔느냐 하면 <변기는 휴지 속으로!> 하고 왔다. 조심하라. 이거 버릇되면 썰렁해진다. 약도 없다.

아이들 동화책 중에 <시내로 간 꼬마곰>이라는 게 있다. 제목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어느 미련 곰탱이같은 꼬마곰이 시내 나갔다가 있는 고생 없는 고생 죽을 고생 살 고생 헛고생 생고생만 죽도록 하고 집에 돌아온다는 눈물과 한숨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인 줄거리의 책이다. 이걸 나는 꼭 <꼬마로 간 시내곰>이라고 읽는다. 조심하라. 이거 버릇되면 썰렁해진다. 약도 없다.

***

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아무생각 없이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는 그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말. 우리 심심한데 이걸 한번 바꾸어 보자. 개구리를 함부로 던지지 마라. 길가의 돌이 맞을 수도 있다. 맞는 돌 기분 나쁘다. 이거 넌센스다. 좀 웃기지 않는가?

나는 공공장소에서 마이크를 설치하고 테스트 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아, 마이크 시험중, 아아, 마이크 너는 지금 테스트 당하고 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대략 웃겼다.

바꾸라. 위치를 바꾸고 순서를 바꾸고 역할을 바꾸고 입장을 바꾸고 또 바꾸라.
바꾸라. 그리하면 웃길 것이다.

오 쓴다는 것, 써야

오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높이높이 내 희망과 절망을 매달아 놓았던가를

─ 최승자, ‘워드 프로세서’

12. 문법을 파괴하면 웃긴다

우리는 가끔 니가 먼저 내 옆구리 찔렀지 내가 먼저 니 옆구리 찔렀냐, 하면서 쓸데 없이 싸운다. 그러나 누가 먼저 옆구리를 찔렀는지는 지금 내 관심 밖이다. 내 관심은 무엇으로 옆구리를 찔렀을까, 이다. 난 이게 정말로 궁금하다.

수건? 전화기? 풍선? 의자? 선풍기? 자동차? 쓰레기통? 코딱지? 책?

이게 어색한 이유는 ‘찌르다’라는 동사에 내장되어 있는 문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니가 먼저 수건으로 내 옆구리 찔렀지 내가 먼저 수건으로 니 옆구리 찔렀냐?

이게 대체 말이 되느냔 말이다.

자,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찌르다’라는 동사이다. ‘찌르다’라는 동사는 늘‘뾰족한 물체’를 데리고 다닌다. 말하자면 ‘뾰족한 물체’는 ‘찌르다’라는 동사의 배우자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천년만년 더불어 살아가 한 무덤 밑에서 또 영원히 지지고 볶는 배우자. ‘찌르다’와 ‘뾰족한 물체’는 우리 머리 속에서 아구찜과 꽃게찜처럼, 꽃게찜과 꽃게탕처럼, 해장국과 감자탕처럼, 라면과 공기밥처럼 붙어 다닌다.

문법은 주어가 단수일 때는 단수동사를, 복수 일 때는 복수 동사를 써야 한다는 것만이 분법이 아니다. 이렇듯 ‘찌르다’라는 동사에 붙어 다니는 ‘뾰족한 어떤 것’도 문법이라고 한다. 이게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그 이름도 찬란한 의미론(semantics)이다!

의미론이야 더이상 나 알 바 아니고, 아무튼 우리는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이게 정상이다.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언어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언어 밖으로 쉽게 나가는 것. 오히려 이게 비정상이다. 자신의 모국어 시스템 속에서 잠시 떠나기 위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고 해도 그래봐야 몇 걸음 못나간다. 사람마다의 차이는 있지만 오십 보 백 보다. 다 정도의 차이다.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의 차이다. 그러나 백 보에서 오십 보를 뺀 차이는 크다. 오십 보! 그리고 똥과 겨는 그 더러움에서 질적으로 비교가 안 된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언어 속에서 비정상이 되어야한다. 웃기기 위해서 우리는 모국어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짓을 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데미안>에 나오는 아브락삭스는 아니지만 웃기기 위해서 우리는 문법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한다. 그리고 웃기는 신에게로 날아가야 한다. 맞다. 웃기는 거 완전 힘들다.

다음은 노암 촘스키가 만든 문장이다.

색깔 없는 초록색 아이디어가 난폭하게 잠자고 있다.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

이럴 때 촘스키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 비정상을 사랑한다.

모국어의 시스템, 즉 문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자는 웃길 것이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당연히 웃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 이쯤이야.
이쯤에서 비를 한 번 뿌리라구.
그리고 똑똑히 봐.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ER

Mar27_2004_wound.jpg

애 셋을 데리고 식당엘 가면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봅니다. 딱 두 종류의 시선이죠. 저집 엄청 부자인가보다 혹은 참 안됐다! 웬만한 시선은 그러려니 합니다. 한 번은 뒷 테이블에서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하도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제가 심기가 불편해져서 아주 대놓고 쏘아보아준 적도 있습니다. “뭘보냐? 사람 처음 보냐? 니가 나 애 셋 낳는데 정액 한 방울 보태준 거 있냐?” 뭐 이런 식이었죠.

저날은 최악이었습니다. 최선의 날도 물론 있었어요. 연세 좀 넉넉히 자신 노인네 부부가 자기들 드시려고 주문한 파전 한 판을 반으로 뚝 잘라 넘겨주시더군요. 애들이 귀엽다고 말입니다. 고맙지요. 없는 살림에 파전 반 판! 그게 어딥니까?

아무려나 어제 저녁에도 외식을 했습니다. 저희 패밀리 외식 메뉴는 딱 두 종류입니다. 칼국수 혹은 뼈다귀해장국! 오늘 메뉴는 뼈다귀해장국이었습니다. ‘원당헌’이라고 잘 하는 집 있습지요. 뼈다귀 싹싹 발라 맛있게 잘 먹고, 아이들은 또 자판기에서 코코아 한 잔씩 뽑아 주고, 집에 와서 나우와 기엽이는 또 컴퓨터 하겠다고 달겨들어 컴퓨터 켜주고, 기언이는 졸려하여 재웠습니다. 물론 아내가 재웠습니다.

저는 귀찮기는 하지만 싸나이 뜻한 바가 있어 운동을 하러 갔습니다. 한 바퀴에 700m 씩이나 되는 트랙을 무려 다섯 바퀴나 돌았습니다. 뛰다가 걷다가 하면서요. 뛰면, 아 이제 내가 여기서 쓰러지는구나, 하는 한계지점에 곧 도착하니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걷지요. 걸으면, 기왕 하는 건데 인텐시브하게 해야 ‘뜻’이 이루어지지 않겠어, 하는 심정에 다시 뛰지요.

네 바퀴 반을 그렇게 돌고 한 지점에 멈추어서서 마무리 운동에 들어갑니다. 팔굽혀펴기 수십회, 양팔 크게 벌려 앞으로 회전시키기 수십회, 양팔 크게 벌려 뒤로 회전시키기 수십회, 중에서 10회 쯤 했는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습니다. 아 누가 술 사준다고 나오라고 하는 구나, 하고 냉큼 받았습니다. 웬 걸. 아내였습니다.

__지금 빨리 집에 와 줄 수 있어?
__엉, 왜?
__나 턱 밑에가 찢어졌어.
__뭐? 알았어. 당장 갈게.

하고는 집에 까지 냅다 뛰어왔습니다. 뛰면서 어느 놈 때문일까, 많이 다쳤나, 응급실엘 가야하나, 애들만 집에 남겨 둘 수도 없고 노인네를 오시라고 할까 고모에게 부탁할까, 오만가지 잡생각을 하면서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서 상처를 살펴보았습니다. 사진과 같습니다. 아 오해마십시요. 저건 원래는 아내 보여주려고 찍은 겁니다. 여기 올리려고 찍은 거 아닙니다. 아무튼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애들을 부탁하고 부랴부랴 병원 응급실엘 갔습니다.

불철주야 격무에 시달리시는 병원응급실 관계자 분들 피로를 잠시 잊으시라고 너스레를 좀 떨었습니다. “저기, 수술 하려면 전신마취해야하나요?” “우리 부부가 원래는 부부싸움 같은 거 잘 안하는데…” “저, 제 아내가 곧 탤런트 될거거든요. 즉 얼굴로 먹고 살아야하니 흉터 안 남게 해주세요.” “떨지마. 내가 옆에서 손 꼭잡고 있을게”

무려 7바늘 꿰맸습니다.

응급실의 레지던트와 간호사들이 묻더군요. 어쩌다가 다쳤느냐고 말입니다. 어쩌다 다쳤을까요? 저도 그게 참 궁금합니다.

.
.
.
.
.
.
.
.
.
.
.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아 글쎄, 저희 싸모님께서 몸짱 되시겠다고 수십년동안 거들떠 보지도 않던 AB 슬라이더를 하시다가 그만 슬라이딩을 하신 거 였습니다.

지금 큰 수술 받으시느라 고생하신 싸모님 주무십니다. 애들도 곤히 잠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