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두음전환(頭音轉換 spoonerism)이라는 용어가 있다. 영국의 권위 있는 귀족 순수한 혈통 루이 윌리엄스 세바스챤 주니어 3세의 친구인 윌리엄 A. 스푸너(1844~1930)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용어라고 한다. 이거 별거 아니다. 이런 거다. 즉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는 social position을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pocial sosition으로 바꾸어 발음하는 것이다. 두 단어의 초성인 s와 p가 서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 밖에도 이런 예들이 있다.
“a well-boiled icicle” for “a well-oiled bicycle”
“a queer old dean” for “a deer old queen”
a crushing blow를 a blushing crow라고 하는 경우 등
한국어는 표기체계자체가 음절 중심이라, 위의 예에서처럼 순수하게 ‘초성’만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다만 ‘초성 + 중성 (+ 종성)’을 포함한 한 음절 전부의 순서를 바꾸면 이와 위의 예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는 한다. 이걸 넓은 의미의 스푸너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래서 <남아일언은 중천금이요 일구이언은 이부자지라>와 <간음빙자혼인죄>같은 말장난이 생겨난다. 오호, 그리고 보라. 이 순 건달! 혹은 진짜 양아치! 혹은 이 썰렁한 작업남! 아무튼 웃기는 짬뽕 같은 오 이 남자!
__오, 아가씨. 커피 있으면 시간 한 잔 할까?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무실의 부속 화장실의 변기 앞 벽에는 이런 구절이 붙어 있다. 조금 전에 보고 왔다.
__휴지는 변기 속으로!
내가 뭐하고 왔느냐 하면 <변기는 휴지 속으로!> 하고 왔다. 조심하라. 이거 버릇되면 썰렁해진다. 약도 없다.
아이들 동화책 중에 <시내로 간 꼬마곰>이라는 게 있다. 제목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어느 미련 곰탱이같은 꼬마곰이 시내 나갔다가 있는 고생 없는 고생 죽을 고생 살 고생 헛고생 생고생만 죽도록 하고 집에 돌아온다는 눈물과 한숨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인 줄거리의 책이다. 이걸 나는 꼭 <꼬마로 간 시내곰>이라고 읽는다. 조심하라. 이거 버릇되면 썰렁해진다. 약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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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아무생각 없이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는 그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말. 우리 심심한데 이걸 한번 바꾸어 보자. 개구리를 함부로 던지지 마라. 길가의 돌이 맞을 수도 있다. 맞는 돌 기분 나쁘다. 이거 넌센스다. 좀 웃기지 않는가?
나는 공공장소에서 마이크를 설치하고 테스트 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아, 마이크 시험중, 아아, 마이크 너는 지금 테스트 당하고 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대략 웃겼다.
바꾸라. 위치를 바꾸고 순서를 바꾸고 역할을 바꾸고 입장을 바꾸고 또 바꾸라.
바꾸라. 그리하면 웃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