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문법을 파괴하면 웃긴다

우리는 가끔 니가 먼저 내 옆구리 찔렀지 내가 먼저 니 옆구리 찔렀냐, 하면서 쓸데 없이 싸운다. 그러나 누가 먼저 옆구리를 찔렀는지는 지금 내 관심 밖이다. 내 관심은 무엇으로 옆구리를 찔렀을까, 이다. 난 이게 정말로 궁금하다.

수건? 전화기? 풍선? 의자? 선풍기? 자동차? 쓰레기통? 코딱지? 책?

이게 어색한 이유는 ‘찌르다’라는 동사에 내장되어 있는 문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니가 먼저 수건으로 내 옆구리 찔렀지 내가 먼저 수건으로 니 옆구리 찔렀냐?

이게 대체 말이 되느냔 말이다.

자,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찌르다’라는 동사이다. ‘찌르다’라는 동사는 늘‘뾰족한 물체’를 데리고 다닌다. 말하자면 ‘뾰족한 물체’는 ‘찌르다’라는 동사의 배우자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천년만년 더불어 살아가 한 무덤 밑에서 또 영원히 지지고 볶는 배우자. ‘찌르다’와 ‘뾰족한 물체’는 우리 머리 속에서 아구찜과 꽃게찜처럼, 꽃게찜과 꽃게탕처럼, 해장국과 감자탕처럼, 라면과 공기밥처럼 붙어 다닌다.

문법은 주어가 단수일 때는 단수동사를, 복수 일 때는 복수 동사를 써야 한다는 것만이 분법이 아니다. 이렇듯 ‘찌르다’라는 동사에 붙어 다니는 ‘뾰족한 어떤 것’도 문법이라고 한다. 이게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그 이름도 찬란한 의미론(semantics)이다!

의미론이야 더이상 나 알 바 아니고, 아무튼 우리는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이게 정상이다.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언어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언어 밖으로 쉽게 나가는 것. 오히려 이게 비정상이다. 자신의 모국어 시스템 속에서 잠시 떠나기 위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고 해도 그래봐야 몇 걸음 못나간다. 사람마다의 차이는 있지만 오십 보 백 보다. 다 정도의 차이다.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의 차이다. 그러나 백 보에서 오십 보를 뺀 차이는 크다. 오십 보! 그리고 똥과 겨는 그 더러움에서 질적으로 비교가 안 된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언어 속에서 비정상이 되어야한다. 웃기기 위해서 우리는 모국어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짓을 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데미안>에 나오는 아브락삭스는 아니지만 웃기기 위해서 우리는 문법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한다. 그리고 웃기는 신에게로 날아가야 한다. 맞다. 웃기는 거 완전 힘들다.

다음은 노암 촘스키가 만든 문장이다.

색깔 없는 초록색 아이디어가 난폭하게 잠자고 있다.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

이럴 때 촘스키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 비정상을 사랑한다.

모국어의 시스템, 즉 문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자는 웃길 것이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당연히 웃기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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