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정가

“저녁 무렵에는 구름과 절묘한 북소리를 내는 우박을 동반한 소나기가 잠시 동안 시원하게 내렸다. 오스카의 피곤해진 양철북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

내가 밤마다 운동을 하는 공원의 약수터에는
딱 두 부류의 사람이 온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 생각은 안하는 사람이 그들이다.
당연하게도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하고
더 짧게 사용해야 하고
남이 틀어놓고 그냥 간 수도꼭지도 잠가야한다.
남이 튕기는 물도 맞아야하고
누군가가 데리고 나온 개가 다리를 혓바닥으로 핥아도 꾹 참아야 한다.
사용중에는 불쑥불쑥 말도 없이 끼어드는 손길들을 참아내야 한다.

비 오듯 땀 흘리고 약수터 갔다가 예의 없는 짓을 두 번씩이나 당하고 나니
갑자기 세상이 절망스러워졌다. 아직 멀었다.
악다구니 쓰지 않으면 물 한 모금 마시기도 힘이 드니……쩝

하여간 여러사람이 사용하는 약수터에서는 뭘해도 욕먹기 십상이다.
내가 뭘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기다려야하기 때문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03(1쇄), 2004(2쇄)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더 많은 음악,
하고 목소리는 말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이름은 없다. 그냥 M이다. 이름이 M이라고 깔보면 안된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의 이름은 이름 석자 다 드러나도 나에게는 무의미한 “임의적 기호”에 지나지 않지만, 나와 관계가 있는 어떤 사람의 이름은 영문 이니셜 하나에도 내 전 존재를 떨게 하는 힘이 있으니까. 그러면 M은 누구인가? M이 ‘더 많은 음악’이라고 말한 목소리이다. M은 “언어학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음악에 미쳐있는 영혼”이었으며 나의 독일어 개인교습교사였다. 그러나 M의 독일어 교습방법은 “이제 간신히 독일어 ABCD 문법 교본을 반 정도만 마스터했을 뿐인 나에게”는 너무 어렵다. 이런 식이다. 내가 한 페이지 정도를 소리 내서 읽고나면 M이 그 중에서 하나의 단어나 문장을 골라 설명을 한다. 장황하게. 길게.

“황량하다, 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있어? 모른다고? 그것은 말이야, 눈에 보이는 특별한 것이 없다,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무책임하고 형식적인 설명일 뿐이야. 눈에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황량할 수도 있어. 좀 다른 거야. 예를 들자면 마치 사막처럼 모두 같은 색으로 보인다든지, 건물은 많으나 살아 있는 것은 전갈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든지, 모두 떠나가 버렸다든지, 어디에도 우물이 없다든지, 기차역이 너무 멀다든지 말이지. 지루하다거나 무미건조하다는 것과는 좀 다르게 생각될 수 있어. 그런데 그는 왜 황량하다, 라고 했을까. 삭막하다, 라거나 공허하다, 라는 단어 대신에 말이지. 그 단어들을 모두 넣어서 아무 문장이나 만들어 얘기해주겠어? 그리고 풍경을 묘사하는 다른 단어들 중에 생각나는 다른 것이 있으면 아무거나 예를 들고 그것과 비교하면서 설명해줄 수 있겠어?”

이상적인 교습법이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다. 그러니 독일어 공부의 진도가 제대로 나갈 리가 없다. 연애면 또 몰라도. 해서 나는 M에게서 독일어는 그만 배우고 대신에 M과 사랑을 한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쉽지가 않다. 나는 사정상 한국에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M에게 세 달 있다가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할 수는 있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둘은 갈등 끝에 헤어진다. 아프다.

새삼스럽게 묻는다. 사랑은 대체 무엇인가? 예전에 나는 ‘사랑은 커뮤니케이션이다.’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 이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배수아는 언어를 사용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이때의 언어의 문제는 사용하는 언어가 모국어냐 외국어냐의 문제는 아니다. M이 ‘나’에게 가르쳐주고자 했던 언어, 즉 ‘보편적’인 언어의 문제이다. 이때 보편적 언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고 정신이며” “인종적인 차이나 개체간의 선천적인 차이보다도 더욱 보편적”인 언어를 의미한다.

언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음악”으로. 그러나 역시 한계는 있다. 그 한계는 무엇으로 극복한단 말인가. 어려운 문제다. 아무려나 당신은 쇼스타코비치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그러니 나는 이 소설 혹은 에세이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사랑은 다 끝났는데 그래도 나는 책상에서 쓴다. 이 책상이 이 소설의 제목인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다. “내가 M에게 무엇인가 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내 책상은 그것이 어디에 있는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가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그대로 옮긴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게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배수아. 이상한 작가다. 묘한 매력이 있는데 그렇다고 깊게 빠져들게 되지도 않는다. 끝으로 인상 깊은 구절 하나: “쓰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일단 쓰기 시작하는 거야. 무척 간단하잖아.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