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것에 대하여

버스정류장, 어느 날 한 노신사가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보며 무얼 찍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그냥 이것 저것이요. 나는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었으나 남이야 카메라로 각선미를 찍든 호두를 깨먹든 무슨 참견이세요, 하는 싸가지 없는 마음가짐으로 말했다. 그러나 노신사는 궁금한 게 많았다. 사진작가냐, 찍어서 전시회도 하느냐, 하면서 질문이 이어졌다. 조금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나치 치하의 어느 유태인이 포로수용소에서 집단생활을 할 때 취했던 방법이었다. <누가 뭘 물으면 진실을 말하고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는 이 방법으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사진을 찍어서 직접 현상을 합니다. 현상이란 필름이 빛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도록 화학적으로 처리하는 걸 말합니다. 그 다음 필름을 스캔해서 제 블로그에 올립니다. 스캔이란 필름에 빛을 쪼여서 그걸 컴퓨터 파일로 만드는 작업이고, 블로그란 일기형식으로 된 제 개인 홈페이지입니다. 저는 사진작가는 아니고 그냥 취미삼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노신사는 질문을 멈추었다. 그가 내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나는 내심으로 그가 내 블로그 주소를 물어주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따위넷이라합니다. 아무 검색엔진에 가셔서 ‘따위넷’이라고 치시면 됩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다.

그 뒤로 가끔 버스정류상에서 그 노신사를 만난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한다. 그는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있네요.” 한다. 나는 “네.”하고 만다. 그러고 나면 할 말이 없다. 그냥 버스가 오길 기다리며 멍하니 서있다. 나는 그 시간이 어색하다. 얼른 버스가 와서 그 시간을 모면하고 싶다.

오늘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또 그 노신사를 만났다. 나는 그와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는 그가 있는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어르신 안녕하세요. 날이 많이 춥죠. 감기 조십하세요.” 하면서 살갑게 대해드리고 싶지만 그게 잘 안된다. 성격탓이다. 아마 노신사도 나를 인지했을 것이다. 그가 속으로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어, 날 보면 지가 먼저 와서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냐,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불편하다. 다음에 노신사를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해야할까?

누가 내 마음에 몰핀주사를 놓아주지 않겠는가?

1.
방심했다. 방심의 대가는 크다. 몸으로 때우고 있다.
마음이 범한 잘못을 몸이 속죄하고 있다. 대속이다.
늘 그렇다. 사고는 마음이 치고 뒷감당은 몸이 한다.
내 몸은 제 안에 깃든 내 마음이 싫겠다.

2.
고작 몇cc의 약물에 몸이 견딜만해졌다.

3.
<라이언 일병 구하기>: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군의관은 총맞아 고통당하고 있는
병사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며 어떤 병사 앞에서 옆에 따르는 위생병에게 말했다.
“몰핀” 가망없으니 고통이나 덜어주라는 뜻이다.

4.
비록 몸은 떠나지만 마음만은 두고 가겠다는 말,
내가 하면 진심이고 상대방이 하면 사기다.

5.
새벽에 깨어나 어둠 속에 자리한 마음이 괴롭다.
몸? 그딴 건 아무래도 괜찮다,
는 생각이 든다. 아직 덜 아픈 것이다.

겨울 아침

알아요 당신,
하고 불러볼 당신이 부재하는,
지난밤 내 슬픔의 바깥 쪽 혈관 몇 개쯤은
동파되어 버린,
그런,
그래도 또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아침.

생각하는 기능이 있는 머리

어제는 나우와 한참동안 시답잖은 입씨름을 했다.

따위: 너는 도무지 생각하는 걸 귀찮아 하니까 네 머리는 생각하는 기능이 없는 머리다.
나우: 아빠, 내 머리가 생각하는 기능이 없는 머리면 내가 어떻게 2단을 외우고, 10단을 외우고, 100단을 외워?
따위: 그딴 건 기엽이도 할 수 있는 거다.
나우: 기엽아, 너 2단 한번 외워봐.
기엽: 몰라.
나우: 거봐.
따위: 기엽아, 해봐. 십일은 십, 십이는 이십, 십삼은 삼십…
기엽: 몰라.
나우: 거봐.
따위: 아무튼 네 머리가 생각하는 기능이 있는 머리면 어떻게 ‘삼사십이 삼오십오’한 다음에 ‘삼육십칠’할 수가 있냐?
나우: 그거야…
따위: 아무튼 너는 조금만 복잡해지면 생각을 안하려고 하니까 네 머리는 생각하는 기능이 없는 머리다.
나우: (분해서 씩씩 거리며 더듬더듬 삼단을 외운 다음) 됐지? 내 머리도 생각하는 기능이 있는 머리 맞지?
따위: 어디, 그럼 사단을 외워봐.
나우: 사일은 사, 사이 팔, 사삼???
따위: 그럼 ‘삼사’는 얼마야?
나우: 삼사?
따위: 응.
나우: 십이.
따위: ‘삼사가 십이’니까 ‘사삼도 십이’야. 자, 사단 다시 해봐.
나우: 사일은 사, 사이 팔, 사삼???, 에이 몰라 안 할래.
따위: 거봐. 네 머리는 생각하는 기능이 없는 머리라니깐.
나우: 아이 정말, 아빠, 내 머리가 생각하는 기능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2단을 외우고, 10단을 외우고, 100단을 외우냐니깐!
따위: 그럼 사단 외워봐.
나우: 싫어!
따위: 거봐.
나우: 흥, 이따가 할머니한테 물어볼거야.
따위: 좋다, 할머니한테 여쭤보자.

오한으로 시작한 신년

그제 낮부터 오한이 났다. 그밤 버스정류장에서 집에 오는 길이 너무 추웠다. 추위가 내 몸의 바깥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것이었으므로 오리털 파카도 소용없었다. 그 와중에 멀쩡하던 안경알 하나가 뚝 떨어져 쨍그렁 소리를 내며 깨졌다. 집에 오자마자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앓았다.

오늘 새벽에 자꾸만 잠이 깼다. 괴로웠다. 아니 아팠다. 신음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누가 들을까 싶어 이를 앙다물었다. 어쩔 수없이 아침에 병원엘 갔다. 의사는 링거를 맞으라고 했다. 꼭 맞아야 하느냐 물었더니 꼭 그렇지는 않다 했다. 대신에 근육주사, 일명 궁둥이 주사는 꼭 맞아야한다고 했다. 맞았다. 한동안 엉덩이가 뻐근했다. 주사는 효과가 좋았다. 이틀 동안 나를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통증이 주사를 맞은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식은땀이 나며 열도 내렸다. 그 와중에 친구 아버님의 부음을 들었다.

주사의 약효가 끝났는지 다시 목이 아파온다. 의사가 처방해준 여섯개의 알약을 방금 털어넣었다. 어쨌든 내일 아침에는 다 털고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