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라피아

비톨트 곰브로비치(지음), 임미경(옮김), <<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2004

조심스럽게 사용해보는 용어인데, 이 소설은 ‘역방향 소설’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뒤로 걸으면 낯설다. 우리가 앞으로 걷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데 3시간쯤 소요되었으니 그 시간 만큼 나는 뒤로 걸어본 ─ 후퇴가 아니다. ─ 셈이다.

나는 순방향은 좋은 의미로, 역방향은 나쁜 의미로 쓴 것이 아니다. 굳이 그 의미를 밝혀보자면 순방향이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순치되어 있는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제목은 ‘Pornografia’인데 grafia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어감상 ‘역방향의 가치가 실현되는 소설적 공간’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포르노는 ‘역방향’의 상징인 셈이다.

p.s.
아, 포르노그라피아에 포르노는 없다.

이미지하다

점심 먹으러가다가 문득 ‘이미지하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미지하다? 재밌는데, 영어에서 image를 동사로 쓰기도 하나? 사전 찾아봐야지. 아무튼 한국에서는 그렇게 사용한 예를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처음 써야겠다. 그런데 ‘이미지하다’가 무슨 뜻이지? 알게 뭐야? 방금 태어난 말인데… 그렇다면 ‘이미지하다’로 무얼 의미할 수 있지? 알게 뭐야? 내가 의미하고 싶은 걸 의미하면 그만이지.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의미하고 싶은 의미를 받아들일까? 알게 뭐야? 지들이 이미지하겠지. 거럼. 자, 말을 만들어 봐야지.

i image, therefore i am.
우리 이미지하러 가자.
너는 너무 이미지한 거 같아.
오늘도 이미지하게 하옵시고.
날씨 미치게 이미지하군.
나는 너를 이미지하고 있어.

이렇게 시시껄렁한 말장난이나 하다가 나는 어제 신문에서 본 어느 광고를, 아니 광고라기보다는 그 광고 속의 모델을 떠올렸다. 그 광고는 B3, B5, B7 이렇게 세 개 면의 우하단에 9단 21cm의 크기로 게재되어 있었는데, 광고기획자들이 의도했던 대로 나는 처음에 B3면에서 그녀를 보았고(예쁘다), 침 한 번 꿀꺽 삼키고 그런가보다하고 시시껄렁한 기사를 읽다가 무심코 신문을 한 장 넘겼을 때 B5면에서 그녀를 또 보았고(역시 예쁘다), 그제서야 다음 장에도 그녀가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설레임과 광고에 ‘당했다’는 씁쓸한 마음으로 B7면을 펼쳤고 예상대로 그녀를 또 보았던(정말 예쁘다)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이미지했던 것이다.

변기 앞에서

미안하다
내가 네 몸을 더렵혔구나
나를 감지한 센서가 서둘러 지우는 나, 나의 흔적
그 앞에서 나
한참을 무참했다 꼭
당신에게 거부당한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나는 자꾸만
더럽다 더럽다
더러워진다

어떤 편지

<아들의 편지>
“사랑하는 어머니, 저를 위해 풀어헤쳐 보이실 세 번째 젖가슴이 있으신지요. 저는 지금 빨리 출세해야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저에겐 지금 천이백 프랑의 돈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이 돈이 꼭 필요합니다. 제 요청에 대해서 아버지께 아무런 말씀도 하지마십시오. 아마 아버지는 반대하실 테지요. 이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저는 절망에 사로잡혀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쏘아버리게 될 것입니다. 돈을 부탁드리는 이유는 뵙게 되면 곧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머니의 답장>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부탁했던 것을 보낸다. 이 돈을 잘 써라. 네 생명을 건지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두 번 다시 이렇게 많은 돈을 네 아버지 모르게 보낼 수는 없을 거야. 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집안의 평화가 깨어지겠지. 이만한 돈을 만들려면 땅을 저당잡혀야만 한단다. 나는 네 계획이 좋은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구나. 도대체 어떤 계획인지 나에게 얘기하는 것이 두려우냐? 네 계획을 설명하는데는 수 많은 편지를 보낼 필요가 없단다. 한 마디만 써보내면 걱정을 안할 수 있지. 네 편지를 읽고 괴로웠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구나.”

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지음), 함규진(옮김), <<안전지대 고라즈데>>, 글논그림밭, 2004

세상 어딘가에 고라즈데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다. 얼마 전 그곳에서 끔찍한 일이 있었다. 지은이는 그 ‘일’을 만화로 그렸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 그건 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