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빛과 토하다

나는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일어나 푸른 빛을 토했다 그 푸른 빛은 그날의 빛이었다 그날은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한 사람이 소실점보다 작아졌다 그날부터 나는 더 게워낼 게 없었다 켁, 켁, 푸른, 푸른, 푸른 빛, 내 생애의 켁 켁 목에 걸린, 멍든, 푸른 빛

 

 

 

 

 

 

왜 그래야 하는데? 왜 꼭 그래야 하는데?

지가 소시 적에 럭비 스쿨(Rugby School)에 다녔다고 뻥을 친 새끼가 있어 과연 럭비 스쿨이 그렇게 사기를 칠 만큼 명문인가 싶어 야후! 코리아 백과사전에서 검색해 보았다. 뭐, 유명하다니까 유명한 줄 알아야지 나 같은 무지렁이가 뭐 뾰족한 수가 있겠나. 그건 그렇고.

백과사전에 재밌는 얘기가 있더라. 이렇다.

“19세기에 들어서 영국의 퍼블릭 스쿨에서는 각 학교가 저마다 특색있는 풋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헐링애트골의 전통적 게임 형식과 정신을 잇고 있던 것이 럭비학교였다. 이 럭비학교에서 1823년 11월에 유명한 에피소드가 된 엘리스 소년의 극적인 플레이가 일어났다. 럭비학교 교정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1823년 당시 풋볼의 규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처음으로 볼을 팔에 안고 달림으로써 럭비게임의 독특한 형식을 만들어낸 윌리엄 웨브 엘리스의 공적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의 경기가 계기가 되어 오늘날의 럭비규칙의 기초가 럭비학교에서 고안되고 이것이 각 학교에 급속히 보급되어 갔다. 팀도 많이 생겨 규칙의 통일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핸들링을 인정하지 않는 일파와 픽업하여 달리는 일파로 나뉘는 결과가 되었다.” (전문은 여기로)

생각해 보라. 게임 한창 하고 있는데 어떤 새끼가 공 들고 뛰는 모습을!
얼라, 저 새끼 저거 뭐야? 저거 뭐 하자는 거야? 저거 저거 완전 똘아이 아냐, 저거!

내가 읽다가 아닌 밤중에 희희낙낙 좋아한 구절은 이거다. “규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처음으로 볼을 팔에 안고 달림으로써”

내친 김에 더 찾아 보니 “럭비학교 교정의 비석”은 이렇게 생겼다.

비문은 이렇다.

“This stone
commemorates the exploit of
William Webb Ellis
who with a fine disregard for the rules of football
as played in his time
first took the ball in his arms and ran with it
thus originating the distinctive feature of
the rugby game.
A.D. 1823”

일은 안되고 심심하니 짤림용 옮긴이의 말이나 써보자, 나여.

번역이 후지니 딴 얘기나 해보자. 나는 언어는 타협해서 쓰는 게 맞다, 고 생각한다. 예컨대 소시 적에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친구 어머니가 어떨 때는 어서 와라, 하시고 또 어떨 때는 어서들 와라, 하셨다. 어서 와라, 하실 때는 나 혼자 놀러 갔을 때이고, 어서들 와라, 하실 때는 여럿이 놀러 갔을 때였다. 단수와 복수를 구별해서 그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단수와 복수를 구별한다면 복수 중에서도 많고 적음은 왜 구별하지 않는가. 가령 혼자 가면 어서 와라, 고 둘이 가면 어서들 와라, 라면 셋이 가면 왜 어서들들 와라, 가 아닌가. 넷이면 어서들들들 와라, 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서들 와라들, 이어야 하는가. 거 봐라들. 내 말이 맞다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언어와 타협할 수밖에 없다. 막말로 언어는 대충대충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데 언어는 대충대충 쓰는 게 맞다는 말이 막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대충 넘어가자. 따지지 말고 살자. 비근한 예로 김치볶음밥은 김치 넣고 볶은 볶음밥이다. 허면 철판볶음밥은 철판 넣고 볶은 볶음밥인가. 거 봐라. 내 말이 맞다. 언어는 대충 쓰는 거다, 대충. 어떨 때는 뜻도 모르고 대충 쓰는 거다. 천할 비에 가까울 근 자를 쓰는 비근하다는 대체 무슨 뜻일까.

그럼 번역은 어떤가. 언어가 본디 대충 쓰는 것일진대 대저 번역이란 대충 쓰는 하나의 체계를 역시 대충 쓰는 다른 하나의 체계로 옮기는 것이니 번역도 대충대충 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속 편한 소리 하고 자빠져 있으면서 번역을 했으니 안 봐도 엉덩방아일 것이다. 번역은 타협이며 결단이며 착복이며 날조다. 타협인 것은 더 설명 안 할 것이니 원하신다면 내 배를 째면 아프니 지나가는 돌멩이의 배를 째셔도 좋거니와 결단인 것은 여러 선택지 중에서 딱 하나만을 골라야 하는 상황이 21세기 초반 말로 ‘느무느무’ 많은 까닭이며 착복은 번역자가 혼자서만 챙겨 먹어야할 의미와 뉘앙스가 많다는 뜻이며 날조인 것은 에잇, 부끄러워 내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리라. 침묵.

나한테서 고맙다는 말 들어야 할 분들은 술 사줘서 고맙다는 말,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말,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 잊어줘서 고맙다는 말,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말, 이래저래 고맙다는 말, 기타등등 고맙다는 말, 여기 산더미처럼 쌓여있느니 각자 구미에 맞게 알아서들 보따리로 챙겨 가시기 바란다.

정작 무기가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다. 내가 정작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앞 문장 딸랑 하나다. 다음 번 옮긴이의 말은 정성들여 쓰겠노라. 속세여, 잘 있거라. 나는 바로 입산한다.

어록

무슨 책에 보니 주인공이 원하는 행복이란 게 고작 밥 지을 때 남편이 뒤에 와서 살짝 안아주고 그러는 거라길래 거 뭐 어렵나 싶어 실천에 옮기려 하다가 쿠사리만 먹었다. “나는 말이야, 빨래 좀 걷어서 개주고 그러는 게 행복이야!”라나 뭐라나. 오늘 백주대낮에도 시커먼 행복이 엄동설한에 스치운다.